‘Forever Giants’ 맷 케인을 말하다

홈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맷 케인(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경령)

 

[야구공작소 김동윤] 2009년 2월의 어느 날, 300승을 달성하기 위한 팀으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선택한 45세의 랜디 존슨은 샌프란시스코의 스프링 캠프가 열리는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가 존슨을 영입한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명예의 전당행이 확실시되는 존슨의 300승 무대를 마련해줌으로써 얻게 될 마케팅 효과였다. 다른 하나는 팀의 암흑기를 끝맺어줄 어린 투수들(팀 린스컴, 맷 케인, 조나단 산체스, 매디슨 범가너)의 멘토 역할이었다. 존슨 또한 자신의 노하우를 어린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한 후배는 가르침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며 도움을 거부했다. 다른 한 명은 먼저 가르침을 주면 그제서야 따랐으며, 나머지 둘은 적극적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어했다.

존슨의 도움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네 명의 어린 투수는 2010년 팀이 56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이후의 행보는 극명하게 명암이 갈렸다. 가르침을 거부했던 선수는 2010 우승을 기점으로 내리막을 탄 끝에 아직까지 친정팀에 복귀하지 못했고, 가르침을 주면 그제서야 따랐던 선수는 잦은 부상으로 때이른 은퇴를 맞이했다. 그러나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가득했던 두 선수는 돌아온 짝수 해에도 새로운 ‘전설’을 써 내려갔다. 맷 케인과 매디슨 범가너가 바로 그 둘이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작년을 끝으로 마운드를 떠난 맷 케인에 대한 이야기다.

 

조용했던 시골 모범생, 낯선 대도시 샌프란시스코의 기대주가 되다

교사였던 부모님 밑에서 성장한 어린 시절의 케인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구수가 4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조용한 성격으로 자라난 케인은 아버지가 동네 고등학교 투수에게서 투심 패스트볼과 포심 패스트볼 그립을 배워 가르쳐준 것을 계기로 야구를 시작했다. 휴스턴 고등학교의 에이스로 성장한 케인은 200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5순위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지명됐다. 입단 2년 차부터 싱글 A에서 조금씩 빛을 보더니, 2004년에는 상위 싱글 A에서 ERA 1.86, 더블 A에서 ERA 3.35를 기록하면서 올해의 샌프란시스코 유망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2005 프리시즌 베이스볼 아메리카 랭킹 전체 13위).

2005년에도 트리플 A에서 순조롭게 성장세를 이어간 케인은 20살의 어린 나이에 홈 구장 AT&T 파크에서 콜로라도 로키스의 김병현을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에서는 패배했지만 이어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원정에서 데뷔 첫 승을, 시카고 컵스와의 홈경기에서 첫 완투승을 거뒀다. 케인은 이해 7경기에서 2승 1패 ERA 2.33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케인은 이 시절을 아주 힘든 나날이었다고 회상한다.

전 도시 생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20살의 어린 아이였어요. 큰 도시, 거대한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뭘 좋아해야 할지도 이해하지 못했죠. 매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콘크리트 도시의 화려한 밤보다는 푸르른 들판 속의 한적한 전원생활에 익숙했던 케인에게 처음 경험하는 대도시와 잦은 원정은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21세, 쓰러져가는 샌프란시스코의 희망이 되다

21세의 루키가 마주한 명문팀의 현실은 무거웠다. 2006년의 샌프란시스코는 타선의 평균 연령이 33.7세에 이르는 노쇠한 팀이었다. 부상에서 복귀한 배리 본즈가 팀 타선을 홀로 이끄는 모양새였고, 마운드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이스 제이슨 슈미트만이 건재한 활약을 선보인 샌프란시스코의 마운드는 21세의 루키인 케인이 무려 190.2이닝을 투구하도록 만들었다.

* 2006년 성적: 32경기(31선발) 13승 12패 190.2이닝 ERA 4.15

2007년에는 팀을 떠난 1, 2선발의 빈자리를 배리 지토와 팀내 최고 유망주 팀 린스컴이 채웠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 늙고 약해진 팀은 지구 꼴찌로 주저앉았고 케인에게도 16패를 선사했다.  물론 케인이 기록한 3.65의 ERA는 아주 뛰어나다고는 보기 어려운 성적이었다. 하지만 이 시즌 리그 선발투수들의 평균 ERA가 4.63이었다는 점, 그리고 15패 이상을 기록한 12명의 선수들 중에서 케인만이 유일하게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7승 16패는 분명 불운한 결과였다. 동갑내기 에이스 린스컴이 사이영 상을 수상한 2008년에도 케인에게는 여전히 승운이 따르지 않았다.

*2008년 샌프란시스코 선발진 성적

1선발 배리 지토 – 32경기 10승 17패 180이닝 ERA 5.15

2선발 맷 케인 – 34경기 8승 14패 217.2이닝 ERA 3.76

3선발 팀 린스컴 – 34경기(33선발) 18승 5패 227이닝 ERA 2.62

4선발 조나단 산체스 – 29경기 158이닝 9승 12패 ERA 5.01

5선발 케빈 코레이아 – 25경기(19선발) 110이닝 3승 8패 ERA 6.05

 

“Matt Cain is getting Cained”

* 케인당했다 – 본인은 제 할 일을 해냈지만 외부 요인 때문에 승리를, 혹은 관심을 얻지 못한다는 과거 샌프란시스코 팬덤 내의 유머.

팬들 사이에서 맷 케인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 잡은 ‘cained’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후로도 ‘불운’이라는 단어는 케인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24세, 45세의 HoFer 랜디 존슨을 만나다

은퇴를 앞둔 랜디 존슨을 영입한 샌프란시스코의 속내는 ‘300승 마케팅’만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존슨의 경험과 노하우가 어린 투수들에게 전달되길 바랐다. 하지만 학생이 열의가 있어야 선생도 가르칠 맛이 나는 법. 팀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린스컴의 기량 발전이었으나 이미 사이영 상 수상자였던 린스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반대로 존슨의 가르침을 가장 열성적으로 따랐던 것은 24세의 케인과 19세의 어린 막내 범가너였다. 그중에서도 룸메이트를 자처하고 나서며 존슨과 가장 열성적으로 붙어 다닌 선수가 바로 케인이었다. 2009시즌 중계 카메라가 샌프란시스코 덕아웃을 비출 때마다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던 장면이 바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존슨과 케인의 모습이었다. 훗날 명예의 전당 입성 인터뷰에서 존슨은 그때의 케인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열린 사고방식과 경청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많은 질문을 했고, 나 또한 그런 그에게 희망을 갖고 몇 가지 괜찮은 조언을 해줄 수 있었죠.”

24살의 케인은 45살의 존슨에게 무엇을 그렇게 얻고 싶어했을까. 2009년 스프링 캠프 당시 존슨은 케인에게 에이스라면 7이닝을 소화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소화할 줄 알아야 하며, 득점 지원 없이도 버텨낼 수 있는 정신력을 지녀야 한다는 에이스로서의 마음가짐을 전달했다. 또 스플리터를 레퍼토리에 추가함으로써 말년에 찾아온 패스트볼 구속 저하를 극복해낸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다. 스프링 캠프부터 이어진 존슨의 멘토링은 바로 그해부터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헌신적이었으나 주목받지 못했던 2인자, 에이스가 되다

이 시절의 케인은 팬들에게 ‘첫 번째’로 꼽히는 스타 선수가 아니었다. 쟁쟁한 스타 동료들 때문이었다. 데뷔 초에는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때의 자이언츠 팬들에게는 무엇보다 배리 본즈의 홈런 레이스가 우선이었다. 보통의 메이저리그 팬들은 평범한 평균자책점으로 많은 패배를 기록한 젊은 선발투수보다 핸리 라미레즈, 팀 린스컴, 버스터 포지 같은 화려한 유망주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랜디 존슨이란 최고의 멘토를 만난 케인은 지난 4년간의 경험을 거름 삼아 에이스로서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케인의 달라진 성적(2009~2012년)

2009년 33경기 14승 8패 217.2이닝 171삼진 ERA 2.89

2010년 33경기 13승 11패 223.1이닝 177삼진 ERA 3.14

2011년 33경기 12승 11패 221.2이닝 179삼진 ERA 2.88

2012년 33경기 16승 5패 219.1이닝 193삼진 ERA 2.79

* 데뷔~2008년 성적: 105경기(104선발) 30승 43패 654.2이닝 558삼진 ERA 3.74

데뷔 이후 ERA 3.60 이하와 13승 이상을 한 번도 기록해보지 못했던 케인은 2009년 평균자책점과 승수 모두에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부상으로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생애 첫 올스타에도 선정되면서 새 시대의 ‘BIG SUGAR’로서도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 BIG SUGAR: 텍사스 홀덤 게임에서 쓰이는 용어로 2번째로 좋은 패를 뜻한다. 맷 케인의 별명 중 하나.

갑작스런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존슨의 조언대로 타자와 적극적으로 승부하며 오랜 이닝을 소화하고자 했다는 점이 분명 큰 영향을 끼쳤다. 한 시즌 전에 비해 크게 발전한 팀 수비(DRS -33 -> 17, Def 20.1 -> 47.5)와 전년도에 비해 3푼 이상 낮아진 BABIP(0.297 -> 0.263), 상당했던 FIP와 ERA의 차이를 생각하면(ERA 2.89, FIP 3.89) 운이 따라준 시즌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FIP를 기록했던 2006년과 비교해도 2009년의 케인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케인이 새로운 구종을 배우거나 투구폼에 변화를 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공을 믿고 스트라이크 존 안쪽으로 찔러 넣으려 했을 뿐이었다. 덕분에 2008년과 비교했을 때 삼진은 다소 줄었지만(K/9 7.69 -> 7.07), 허투루 낭비하는 공을 크게 줄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BB/9 3.76 -> 3.02). 케인은 두 시즌 동안 정확히 같은 217.2이닝을 소화했지만, 각 시즌의 투구 수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3606개 -> 3362개)

 

맷 케인의 2008년(좌), 2009년(우) 피칭 로케이션 (출처 : 팬그래프닷컴)

 

케인은 2010년에도 안정된 기량으로 린스컴과 원투펀치를 이뤘다. 특히 포스트시즌 3경기에서 2승 무패 ERA 0.00의 완벽한 활약을 펼치면서 연고지 이전 후 최초인 56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2011년에는 버스터 포지의 부상과 힘 빠진 타선 탓에 2점대의 ERA로 12승 11패를 거두면서 또 한 번 불운을 겪었지만, 선발투수로서는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에이스 린스컴에게서는 서서히 드래프트 시절부터 우려했던 ‘이상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린스컴은 분명 최고의 투수였지만, 2011년의 린스컴이 뿌린 공은 결코 이전만큼 위력적이지 않았다. 

때문에 2011년 오프시즌 진행된 샌프란시스코와 린스컴의 연장계약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결국 샌프란시스코는 2012시즌 초 린스컴이 아닌 케인에게 6년 1억 2750만 달러의 대형 계약을 선사하기로 결정했다. 브라이언 세이빈 단장은 케인의 빼어난 최근 성적과 팀내 투수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높게 평가했다. 케인은 5년 연속으로 200이닝 이상(2006시즌 190.2이닝)을 투구한 건강한 선수였고, 안정적인 투구폼 덕에 부상 우려도 적어 보였다. 투수들의 전성기 연령대인 27세부터 33세까지를 커버하는 이 계약은 케인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2시즌에도 샌프란시스코의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선 선수는 린스컴이었지만, 시즌이 진행될수록 케인의 위상은 높아져만 갔다. 그러던 2012년 6월, 케인은 전세계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대형 사고를 쳤다.

 

프랜차이즈 최초의 퍼펙트 게임, 그리고 아름다웠던 2012년

 

자이언츠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된 맷 케인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경령)

 

2009년부터 변화를 시도했던 케인에게 2012년은 그 변화의 정점을 보여준 해였다. 케인 스스로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했던 퍼펙트 게임 때문이었다. 이날 케인은 그레고 블랑코, 멜키 카브레라의 믿을 수 없는 캐치와 호아킨 아리아스의 송구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스스로도 역대 퍼펙트 게임 최다 타이인 14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면서 물이 오른 기량을 과시했다. 4만여 명의 관중과 부인 첼시 앞에서 달성해낸 자이언츠 프랜차이즈 최초, 메이저리그 통산 22번째의 퍼펙트 게임이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무던하게 임하고 감정표현에 서툴던 케인에게서 풍부한 포즈와 표정을 목격할 수 있었던 이색적인 경기이기도 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잘 모르겠다는 말과 ‘블랑코의 캐치’만을 반복하던 그의 모습은 AT&T에 모인 많은 팬들을 웃음짓게 했다. 이 경기를 통해 케인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세 번째 올스타에 선정됐으며, 생애 첫 올스타전 선발투수로 나서 승리투수의 영예까지 거머쥐었다.

케인의 질주는 후반기에서도 이어졌다. 선발진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팀의 지구 1위 등극을 이끌었고, 포스트시즌에서도 매 시리즈마다 마지막 선발투수로 나서 한 경기도 패하지 않았다. 에이스 매치에 강했던 팀 린스컴과 월드시리즈의 전설 매디슨 범가너처럼 가을 야구에서도 너무나 뛰어났던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려졌지만, 가을에 강했던 또다른 ‘가을 남자’ 맷 케인이 없었다면 201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짝수 해 전설’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맷 케인의 2012년 포스트시즌 기록

NLDS 1차전: 5이닝 3실점 1볼넷 4삼진 (패)

NLDS 5차전: 5.2이닝 3실점 2볼넷 5삼진 (승) * NLCS 진출

NLCS 3차전: 6.2이닝 3실점 1볼넷 2삼진 (패)

NLCS 7차전: 5.2이닝 무실점 1볼넷 4삼진 (승) * WS 진출

WS 4차전: 7이닝 3실점 2볼넷 5삼진 (ND) *2012 WS 우승

* 통산 포스트시즌 기록 – 8경기 4승 2패 2.10 ERA 51.1이닝 33삼진

 

거듭되는 부상, 잃어버린 신뢰

2013시즌은 맷 케인이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막전 선발로 나선 해였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끊임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The Horse’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이닝을 소화한 케인의 몸이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5년이 지난 지금은 ‘데드 암’을 부르는 무리한 투구에 대한 경각심이 팬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때만 해도 그런 인식은 그리 일반적이지 않았다. 린스컴의 반등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많았어도, 연장계약 첫해 커리어 하이와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케인을 의심하는 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인의 팔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소화 이닝과 투구 수

  1. CC 사바시아 1591.2이닝 24132개
  2. 로이 할러데이 1571이닝 22755개
  3. 저스틴 벌랜더 1542.1이닝 25246개
  4. 댄 하렌 1541이닝 24293개
  5. 펠릭스 에르난데스 1536이닝 23657개
  6. 맷 케인 1490.1이닝 23959개 (+ 2005년 46.1이닝 263개)

 

21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꾸준히 마운드에 올랐던 케인의 팔은 무적이 아니었다. 위의 리스트에 올랐던 투수들 역시 케인을 시작으로 차츰 무너져 내렸다. 오직 저스틴 벌랜더만이 2015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살아났을 뿐이다.

2012년까지 선수생활 내내 이렇다 할 장기 결장이 없었던 케인은 데드 암 증상이 나타난 2013년을 기점으로 매년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2013년에는 라인드라이브 타구에 맞아 커리어 최초로 DL에 올랐고, 2014년 오른쪽 팔꿈치 뼈 제거 수술, 2015년 오른쪽 팔뚝 힘줄 염좌, 2016년 햄스트링 부상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2015년 스프링 캠프까지만 해도 스스로의 몸 상태를 자신했던 케인은 어느새 자신의 몸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팀의 암흑기에 데뷔한 고졸 루키가 새 시대가 올 때까지 마운드에서 버티고 또 버틴 결과는 빠른 하락세와 어린 팬들의 비아냥, 그리고 때이른 은퇴였다. 다행히 케인은 1억 달러가 넘는 초대형 계약을 통해 노고에 대한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고생 끝에 찾아온 전성기와 위상은 즐길 새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에이스로 올라서는 데에만 7년이 걸렸지만, 강렬했던 2012년 이후의 5년은 본인에게나 팬들에게나 고통스러웠던 시간이었다.

 

다른 곳에서 뛰는 내 자신은 상상할 수 없다

 

전 이번주를 끝으로 메이저리그 유니폼을 확실히 벗습니다. 다른 곳에서 뛰는 제 자신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자이언츠는 저와 제 가족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며 소중한 곳입니다. 전 자이언츠가 제 삶의 일부분이 된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충분히 즐겼어요.”

 

2017년 9월 27일(현지시간), 자신의 33세 생일을 4일 앞둔 케인은 AT&T 파크에서의 은퇴식을 앞두고 은퇴 소감을 남겼다. 선수 생활을 그만두기에는 분명 이른 나이였다. 동갑내기 린스컴처럼 다른 팀에서 재기를 노려볼 수도 있었지만, 케인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한다며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케인은 자이언츠가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이래 10년 이상을 자이언츠에서만 활약하고 은퇴한 네 번째 선수이고(나머지 셋은 짐 데이븐포트, 스캇 가렐츠, 로비 톰슨), AT&T 파크를 홈 구장으로 삼은 2001년 이후로 기준을 잡으면 팀의 유일한 ‘원 클럽 맨’이다.

3일 뒤인 9월 30일.  케인의 은퇴 경기는 만원 관중을 불러모으지 못했다. 대신 누구보다도 케인을 사랑하는 팬들이 경기장에 모였다. 모두가 케인이 던지는 공 한 구 한 구를 같이 응원하고 박수를 보냈다. 브루스 보치 감독은 케인이 5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승리투수 조건을 갖춘 채 마운드를 내려오자 악수를 건넸다. 홈 팬들에게 케인과 작별할 시간을 주기 위한 배려였다. 은퇴에 대한 잡념을 많이 떨쳐냈다던 케인도 웃으며 내려와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끝까지 덤덤한 듯 보였던 케인이지만, 결국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던 범가너를 보자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인구가 4만 명도 되지 않는 시골에서 올라와 대도시 샌프란시스코의 에이스가 되고, 같은 추억을 공유하며 특별한 유대관계를 자랑했던 그들이었다. 케인이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자 그런 그를 다시 한 번 꼭 안아주는 범가너의 포옹은 그날의 명장면이었다.

케인의 작별인사 이후로도 경기는 계속 진행됐다. 결과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게 2:3 역전패. 결국 케인의 마지막 등판 역시 “Cain is getting Cained(케인이 케인당했다).” 였다.

 

San Francisco Giants on Matt Cain

보치 감독과 범가너가 은퇴를 앞둔 케인에 대해 남긴 말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맷 케인’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알려준다.

“Forever Giants. 맷 케인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해준 모든 일에 충분히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내가 올해 어떤 말을 해도 불만을 내뱉은 적이 없었고 난 그걸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완벽히 자이언츠를 위해 행동했어요.”

브루스 보치 감독

 

난 이 곳에서 그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몇 마디 문장과 몇 분의 시간으로 표현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옳지 않아요. 케인은 특별한 사람이고 역대 최고의 자이언츠 선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 최고의 친구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고요.”

매디슨 범가너

 

은퇴 당시만 해도 구체적인 계획 없이 가족들과 편하게 TV를 보고 싶다던 케인은 올 겨울 샌프란시스코 스프링캠프에 특별 어시스턴트 코치로 모습을 비췄다. 같은 팀 후배 크리스 스트라튼의 간절한 구애와 보치 감독, 브라이언 세이빈 단장 특별 보좌의 요청 때문이었다. 9년 전 자신이 랜디 존슨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케인은 후배 투수들의 멘토가 되어주기로 했다. TV 시청은 두 달 미루고 말이다. 시범경기 첫 등판을 마친 스트라튼은 올겨울 동안 케인에게서 배운 것들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의지하기 편한 사람입니다. 그는 작년에도 저나 타이 블락 같은 어린 투수들에게 시간을 쏟고 싶어했지요. 그런 그에게 지난 몇 달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겨울 동안 매달렸지요. 내게 조금 더 가르쳐 달라고요. 그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단순합니다. 항상 프로페셔널할 것, 매번 상대를 적극적으로 공략할 것.”

크리스 스트라튼

1992년 랜디 존슨이 대선배 놀란 라이언에게, 2009년 맷 케인이 대선배 랜디 존슨에게, 그리고 2018년 크리스 스트라튼이 팀 선배 맷 케인에게. 26년 전 시작된 그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다.

 

Forever Giants

 

Forever Giants NO.18 Matt Cain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경령)

 

케인은 지난 10월 플레이어스 트리뷴에 한 편의 글을 기고했다. 왜 다른 곳에서 재기를 노리지 않았는지를 묻는 팬들에게 자신이 자이언츠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이언츠로 남아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내 자신을 성장시킨 바가 야구보다, 내가 투구한 이닝보다, 심지어는 팀의 우승을 이끈 그 경기보다도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숫자로는 평가하지 못할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스카우팅 리포트로는 이해하지 못할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제가 팬분들께 15년 동안 야구에 대한 추억을 드렸고, 그분들에게서 인생을 돌려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전 이곳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았고, 남자가 됐고, 남편이 됐으며, 아버지가 됐습니다. 어떻게 돌아봐도 전 진정으로 자랑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맷 케인이고, 투수이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라는 사실을요.”

맷 케인

 

데뷔부터 은퇴까지 커리어 내내 화려함이나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멀었던 맷 케인.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팬들에게 케인은 팀의 암흑기를 지탱해준, ‘백투백 사이영 상 수상자’ 팀 린스컴이나 ‘빅게임 피처’ 매디슨 범가너 못지않은 최고의 투수였다. 연고지 이전 후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프랜차이즈 첫 퍼펙트 게임의 강렬한 추억을 남겨준 ‘임팩트 있는’ 에이스이기도 했다.

 

*맷 케인 통산 성적(2005~2017)

342경기 104승(15완투, 6완봉, 1퍼펙트 게임) 118패 1홀드 2085.2이닝 ERA 3.68 1694삼진 fWAR 29.9

(* 샌프란시스코 연고 이전 후 규정 이닝 선발투수 기준 – 다승 5위, 이닝 3위, ERA 24위, fWAR 3위, 삼진 3위)

 

 

기록 출처: Fangraphs, baseball-reference, The Players’ Tribune, San Francisco Chronicle, NBC Sports

에디터=야구공작소 이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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