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야구장이 온다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신민경 >

당신은 프랑스 초원을 여행하고 있다. 초록 들판 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젖소 떼가 보인다. 얼룩무늬 소 떼 사이에서 난데없이 보랏빛 소가 고개를 내민다. 이를 본 당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SNS에 업로드한다. 게시물은 엄청난 조회수와 좋아요를 받는다. 며칠 뒤, 초원은 보랏빛 소를 보기 위해 몰려든 여행객들로 가득 찬다.

21세기 최고의 마케팅 전략가 세스 고딘은 그의 저서 『보랏빛 소가 온다』에서 ‘리마커블(Remarkable)’한 제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세스 고딘은 광고의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충고한다. 특히 소비자들이 범람하는 광고에 둔감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제품이 독특하다면 광고를 통해 소비자들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소비자가 먼저 제품을 구매하고 입소문을 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효과가 미미할뿐더러 측정하기도 어려운 광고에 돈을 쏟아붓기보다 리마커블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야구단에 있어서 젖소의 얼룩무늬처럼 익숙한 것은 무엇일까? 야구장의 초록 잔디도 그중 하나다. 천연 잔디야 당연히 초록색일 테지만 인조 잔디까지 초록색이어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 만약 라이온즈 파크에 파란색 잔디, 케이티 위즈 파크에 검은색 인조 잔디를 덮는다면 팬들의 반응이 어떨까? 다른 야구장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된, 압도적으로 독보적인 포지셔닝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리마커블함을 가능케 하는 요소는 잔디의 ‘색’이다.

 

야구단의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예로부터 컬러는 브랜드를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인간이 처리하는 정보 중 무려 87%가 시각 정보에 해당한다. 그 시각 정보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요소는 ‘색’이다. 오늘날에는 컬러를 통한 마케팅을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부른다. 배달의민족 하면 민트색, 카카오톡 하면 노란색을 떠올리는 것도 성공적인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물이다. 

우리 브랜드와 다른 브랜드의 제품이 비슷할 때 가장 손쉽게 차별화하는 방법은 색을 바꾸는 것이다. 색깔은 차별성을 가진다. 또한 색은 소비자의 잠재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인지 요소다. 컬러를 바꾸는 것만으로 소비자의 구매 의지가 증가하거나 변화한다. 오늘날의 기업들은 독자적인 컬러를 개발함으로써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고 소비자의 구매 의욕을 높인다.

< 카리스마틱 레드(좌)와 타이거즈 미드나잇 블랙(우) >

최근에는 프로야구단이 본격적인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기도 했다. 2021년 SSG는 ‘카리스마틱 레드’, KIA는 ‘타이거즈 미드나잇 블랙’이라는 색상을 개발하고 홍보했다. 양 팀은 유니폼과 굿즈 등에 팀의 상징색을 집어넣었다. KIA는 ‘미드나잇 블랙’이라는 굿즈 시리즈를 따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극단적인 예시지만 만약 KBO 리그 전 구단이 각자의 팀 컬러를 홈구장 잔디색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현장 관중들의 고객 경험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더라도 각 구단끼리의 차별성은 지금보다 확연히 높아질 것이다. 

 

보이시 대학의 푸른 미식축구장

미국의 보이시 대학 풋볼팀은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1986년 진 블레어마이어 감독은 홈구장인 알버트 선스 스타디움의 잔디 교체 작업을 앞두고 문득 의문을 품었다. ‘어차피 인조 잔디면 꼭 초록색일 필요는 없다. 대학교의 상징인 파란색 잔디를 깔면 어떨까?’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고 효과는 엄청났다.

알버트 선스 스타디움은 미식축구 팬이라면 한 번쯤 방문하고 싶어 하는 명소로 거듭났다. 지역 일간지의 설문조사 결과 푸른 잔디를 선호한다는 답변이 90% 이상이었다. 구단의 인지도는 크게 높아져 유망한 고교 선수를 스카우팅 하는 작업이 훨씬 수월해졌다. 학생들은 ‘Protect The Blue’라는 슬로건을 만들어 충성심을 표현했다.

보이시 대학은 한술 더 떠 파란색 잔디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받았다. 그 이후로 미국에서 파란색 잔디를 사용하고자 하는 모든 스포츠팀은 보이시 대학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 보이시 대학교의 푸른색 풋볼 구장 >

우리나라에도 테니스 코트를 보랏빛으로 물들인 브랜드가 있다. 실내 테니스장 업체 ‘테니스 판타지’ 이건우 대표의 인터뷰를 보면 보랏빛 코트의 마케팅 효과가 여실히 드러난다. 테니스 판타지는 보라색 코트를 공개한 뒤로 SNS를 통해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 무려 만 명 가까운 팔로워가 새로 유입됐다. 특히 주 고객이 20~30대라는 점, 70%가 여성 회원이라는 점은 고무적이다. 코트 색깔을 교체하는 단순한 작업이 테니스장의 인지도, 고객 연령, 성별까지 바꿔버린 셈이다.

< UNOH 레이서스 홈구장 >

야구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댈러스에 위치한 패리시 에피스코팔(Parish Episcopal) 고등학교는 푸른색 잔디를 야구장에 깔았다. 노스웨스턴 오하이오 대학(University of Northwestern Ohio, UNOH) 야구팀은 내야를 붉은색 잔디로 덮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면 KBO 리그 홈구장에도 컬러 터프(색깔 인조 잔디)를 들여올 수 있을까? 3가지 관점에서 현실성을 체크해 보자.

 

1. 규정상 문제는 없을까?

2.01, 경기장의 설정

워닝트랙은 잔디와 시각적(예를 들면 색상)으로나 촉감의 차이를 두어야 한다. 이는 천연잔디 또는 인조 잔디에 모두 적용된다.

그림 중 파울 라인 및 굵은 선으로 표시된 모든 선은 페인트나 무독성의 불연성 분필 가루 또는 기타 흰색 재료로 그린다.

이렇듯 2023 KBO 공식 야구 규칙에는 잔디 색깔과 관련된 별도 규정이 없다. 잔디가 워닝트랙 및 흰색 파울 라인과 구별되기만 한다면 문제없는 셈이다. 물론 유니폼과 장비 규정을 보면 잔디색과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투수의 녹색 글러브가 타자에게 혼란을 준다는 이유로 종종 사용 금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컬러 터프에서 경기할 때는 장비 색이 잔디색과 겹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다만 SSG의 녹색 유니폼은 금지된 적이 없다. 따라서 컬러 터프와 비슷한 색의 유니폼을 착용하는 것은 문제없을 것으로 보인다.

 

2. 특수한 색이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은?

경기력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을까? 패리시 에피스코팔 고등학교 홈구장의 시공을 담당한 시메트리 터프(Symmetry Turf) 사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답했다. 선수들은 금세 파란색 잔디에 적응했다. 색깔 변화는 잔디 품질과도 무관했다. 초록색 대신 파란색 염료를 넣었을 뿐 공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제조사는 잔디 개발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코칭스태프를 초청해 테스트를 거쳤다. 만약 바운드가 너무 느릴 경우 인조 잔디에 모래 비율을 높였다. 반대로 공이 빠르고 강하게 튈 때는 고무 함량을 높이는 방식으로 원하는 반발력을 만들어 냈다.

 

3. 어떤 팀이 컬러 터프를 사용하게 될까?

컬러 터프는 인조 잔디다. 개방형 야구장에 컬러 터프를 새로 깐다면 기존의 천연 잔디에서 인조 잔디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천연에서 인조로 바꾸는 것은 색에 앞서 선수의 경기력, 안전성 등의 문제로 쉽게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반면 인조 잔디가 유일한 선택지인 폐쇄형 돔구장이라면 컬러 터프는 실험해 볼 만한 선택지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컬러 터프를 고려해 봄 직한 팀은 청라돔 입주가 예정된 SSG 랜더스다. 키움은 고척돔 공사 당시 메이저리그 수준의 인조 잔디와 흙을 깔았다. 청라돔 역시 유사한 수순대로 잔디 공사를 진행하면서 색깔만 ‘카리스마틱 레드’로 제조사에 요청하면 된다. 

 

번외. 컬러 터프는 지식 재산권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까?

SSG 랜더스가 청라돔에 붉은 잔디를 깔았다고 가정하자. 앞선 보이시 주립대처럼 컬러 터프에 대한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 KIA가 SSG를 따라 붉은색 잔디를 깔 경우 SSG의 허락이 필요할 것이다. 

변리사에게 문의한 결과 애매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구단이 컬러 터프를 지식 재산권으로 보호받으려면 저작권 혹은 상표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먼저 저작권으로 인정받으려면 독창성을 가진 창작물이어야 한다. 단순히 잔디를 붉은색으로 깐다고 해서 독창성이 인정되는지는 의문이다.

상표권은 어떨까? 상표법에서는 특정한 색상을 특정한 제품에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허가를 내주기도 한다. 일례로 젤리 브랜드 ‘하리보’는 금색 젤리 포장지를 색채 상표로 인정받았다. 다른 젤리 브랜드는 포장지에 금색을 넣을 수 없다. 색채 상표 등록 조건은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1) 상표 등록 전부터 그 색상을 계속 사용해 온 사실이 널리 알려져야 한다.

2) 경쟁 제품은 그 색상을 사용한 적이 없어야 한다.

3) 제품의 기능을 위해 꼭 필요한 색상이 아니어야 한다.

청라돔의 컬러 터프도 색채 상표로 인정받으려면 1) 붉은 잔디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어마어마하게 유명해져야 하고, 2) 다른 경쟁 팀이 유사한 색깔의 잔디를 사용한 적이 없어야 하며, 3) 잔디의 기능을 위해 그 색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어야 가능하다. 다만 위 조건이 모두 갖춰진다 해도 꼭 색채 상표 등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색채 상표 등록은 매우 드물고 절차도 복잡하다. 만약 쉬웠다면 코카콜라는 빨간색 캔을, 포카리스웨트는 파란색 라벨을 상표로 등록했을 것이다.

결국 저작권과 상표권 모두 인정받기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붉은 야구장 잔디가 ‘어마어마하게 유명해질’ 확률은 높지만 말이다.

 

세스 고딘은 ‘위험한 길이 오히려 안전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홈구장에 초록색 인조 잔디를 덮을 경우 그 잔디는 다른 구장의 천연 잔디와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랏빛 잔디를 깔면 그럴 일이 없다. 색상이라는 기준 잣대를 새롭게 창조하기 때문이다. 해당 구장은 컬러 터프라는 영역에서 홀로 존재한다. 그에 따른 혜택도 온전히 누린다. 세스 고딘은 덧붙인다. 

“부족한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다.”

경영 환경은 광고의 시대에서 입소문의 시대로 회귀하는 중이다. 마케팅은 더 이상 제품에 더하는 것이 아니다. 제품 자체가 마케팅되어야 한다. 별다른 홍보 없이도 소비자들이 반응할 만큼 ‘리마커블’한 제품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야구장의 잔디도 얼마든지 리마커블해질 수 있다. 과연 언제, 어느 야구단이 보랏빛 소를 탄생시킬지 주목해 보자.

 

참고 = 보이시 대학교 홈페이지, UNOH Racers 공식 트위터

야구공작소 조훈희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박주현, 오연우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신민경

ⓒ야구공작소. 출처 표기 없는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상업적 사용은 별도 문의 바랍니다.

Be the first to comment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