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상체 위주로 던지는 이유

야구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메이저리그 투수들이나 KBO 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투수들이 상체 위주 투구폼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런 평가에는 주로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에 비해 힘과 체격이 월등하므로 상체 위주로 던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뒤따른다. 반면에 동양인들은 타 인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하므로 하체 위주 투구폼이 더욱 권장되곤 한다. 비단 야구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 종목을 막론하고 하체는 매우 큰 역할을 차지한다. 그런데 야구 선수들 중에서도 최고만 모인다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왜 비효율적인 상체 위주 투구폼으로 던지는 것일까? 그들은 정녕 하체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 역시 하체를 대단히 중요시 여긴다. 미국의 피칭 코치 또는 이론가들이 투구폼을 논할 때 하체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모습은 SNS와 같은 각종 매체나 인터뷰 그리고 컨벤션 등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이 상체 위주로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동양과 서양이 생각하는 하체의 활용법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밸런스 그리고 가속도

투구폼이 좋지 못한 투수에게 흔히 ‘밸런스가 무너졌다’라는 평가가 내려지곤 한다. 이처럼 투구폼에서 밸런스는 분명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밸런스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차이가 조금씩 존재한다. 투구는 항상 앞다리를 들어 올리는 리프팅으로 시작한다. 일본에서는 밸런스 그 자체를 중요시해 몸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리프팅이 매우 정적이고 잠깐의 정지 동작을 가지기도 한다. 또한 리프팅 동작을 ‘힘을 모으는’ 과정이라 여겨 리프팅을 천천히 기를 모으듯이 하여 더욱 정적인 모습이 강조된다. 이는 야구를 스포츠를 넘어 정신 수양의 수단으로 여기는 일본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처럼 극단적으로 정적인 투구폼은 많이 보이진 않지만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만큼 밸런스의 중요성은 크게 여겨진다. 반면 미국에선 리프팅을 가속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제이콥 디그롬과 기쿠치 유세이의 리프팅

제이콥 디그롬은 리프팅을 완료한 시점에서 이미 무게중심이 어느 정도 전진 되어 뒷발과 멀어져 있다. 반면에 기쿠치 유세이의 경우 무게 중심이 뒷발 제자리에 있는 채로 앞다리만 올라가 있다. 만약 디그롬이 리프팅 후 정지를 시도했다간 그대로 옆으로 넘어지게 될 것이다. 이 현상을 미국에선 ‘드리프트’라고 부른다. 뉴턴의 제2 법칙(힘=질량X가속도)에 따라 이 넘어지는 듯한 느낌을 공짜로 생성된 가속도로 활용하여 더 큰 힘을 내는 원리다. 반대로 기쿠치는 균형 감각이 허락하는 한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서 있는 것도 가능하다. 이로 인해 밸런스를 중시하는 동양에서는 시작부터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듯한 드리프트 동작이 마치 밸런스가 무너진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마냥 밸런스를 포기하고 가속도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드리프트를 통해 가속도를 얻는 과정에서 신체가 좌우로 흔들리면 이제껏 생성한 가속도는 의미가 없어진다. 동적인 밸런스 즉 ‘다이내믹 밸런스’를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속도를 얻는 것이 관건인데 이는 일본에서 중시하는 정적인 밸런스와는 다른 개념이다.

리프팅을 하면 한쪽을 지탱하던 기둥이 바닥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무게 중심이 진행 방향으로 향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일본 투수들처럼 인위적인 정지 동작을 하지 않는 이상 드리프트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든지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은 리프팅을 하는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본인 스스로 인식못하는 경우도 많아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뒷다리로 깊이 앉아라?

선동열과 박찬호의 스트라이드

우리나라에서는 선동열과 박찬호를 필두로 스트라이드 시 뒷다리로 더 깊이 앉을수록 하체의 개입도 높다고 여긴다. 깊이 앉는다는 것은 그만큼 근육의 가동범위가 넓은 것이기 때문에 더 큰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덜 앉아서 던지는 서양인들의 투구폼이 상체 위주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아예 하체 위주의 ‘드롭 앤 드라이브’ 그리고 상체 위주의 ‘톨 앤 폴’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투구폼이 나누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뒷다리로 앉을 수 있는 깊이는 다리의 길이와 관련이 깊다. 투구와 비슷한 동작인 스쿼트를 예시로 들어보자.

다리 길이에 따른 스쿼트 자세의 차이

위 그림과 같이 똑같은 깊이의 스쿼트를 하기 위해선 다리가 긴 사람은 신체의 비율 상 몸을 더 앞으로 숙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무게중심이 몸 뒤쪽으로 넘어가서 뒤로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을 숙이지 않고 스쿼트를 한다면 다리가 긴 사람은 짧은 사람에 비해 깊이 앉을 수가 없다.

다시 투구폼 이야기로 돌아오면 사이드암 투수가 아닌 이상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던지지는 않기 때문에 다리가 긴 투수일수록 스트라이드 시 뒷다리로 앉는 깊이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랜디 존슨의 스트라이드

메이저리그에서도 장신인 축에 속했던 랜디 존슨의 투구폼을 보면 뒷다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듯해 마치 완벽한 상체 위주의 투구폼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워낙 긴 다리 길이를 가진 그에겐 그 정도가 하체 활용을 위한 최적의 깊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하체를 더 활용한다고 뒷다리로 깊이 앉으려면 그만큼 몸을 더 숙여서 던져야 하기 때문에 투구폼을 전반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랜디 존슨 뿐만 아니라 많은 서양인들이 동양인에 비해 다리가 긴 경우가 많다. 그들의 하체 근육 개입도가 동양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을 순 있지만 개인의 신체조건을 고려했을 때 그 투구폼이야말로 자신만의 하체 위주 투구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뒷다리로 앉는 깊이가 적다고 해서 섣불리 상체 위주 투구폼이라고 속단할 순 없다.

하체 활용만큼이나 중요한 것

드라이브라인의 모션 캡처 투구분석

미국에는 드라이브라인과 같이 모션 캡처를 통하여 투구폼을 분석하는 기관들이 늘어나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기관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오메카닉 분석을 통해 투구폼을 단순히 상체 위주 하체 위주로 나누지 않고 동작을 더 세분화하여 분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인종 간에 투구폼을 나누는 경계도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서양인이라는 이유로 타고난 신체 조건을 믿고 맹목적인 상체 위주의 투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왜소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반드시 온몸을 쥐어짜내는 듯한 투구폼으로 던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투구폼이라는 동작 내에는 지면반력, 상·하체 분리, 어깨 회전속도, 팔의 외회전 각도 등 이외에도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이 많은 요소들이 합쳐져 생겨난 산물이 바로 투구폼인데 이를 단순히 서양인이라 피지컬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상체 위주 투구폼이라고 치부할 순 없다. 시속 140km가 넘는 공을 단순히 강력한 상체 힘만으로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막연하게 투구폼을 맨눈으로 분석하고 그럴듯해 보인다는 이유로 섣불리 평가하는 것은 이젠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야구공작소 양재석 칼럼니스트

에디터= 야구공작소 오석하, 전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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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1.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만약 선동열과 박찬호의 키와 다리 길이가 랜디 존슨처럼 훨씬 더 많이 길었었더라면 그들도 하체 위주가 아닌 상체 위주의 투구폼으로 분석됐었을 수도 있었을까요…ㅎㅎㅎ웃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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