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의 선발진을 이끄는 리더, 크리스 배싯

(사진 출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공식 트위터)

지난 3년 동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게 있어 마운드의 핵심은 불펜이었다(18~20년 불펜 ERA 3.48 → 전체 1위). 물론 매년 저비용 고효율 투수들로 가득했던 선발진도 준수했다. 하지만 ‘컨텐딩’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엔 다소 무게감이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18~20년 선발 ERA 4.15 – 리그 10위). 이렇게 선발보다는 불펜에 초점을 맞췄던 오클랜드가 2021년에는 새로운 물결을 타며 움직이고 있다.

현재 오클랜드 선발진은 리그 8위에 해당하는 평균자책점(3.73)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하지만 투수의 고유 능력을 판단하는 수비 무관 평균자책점(이하 FIP)과 팬그래프 승리기여도(이하 fWAR)가 각각 3.74, 12.1로 리그 전체 5위다. 범위를 좁혀보면 더 놀랍다. 지난 6월부터 오클랜드가 남긴 선발 평균자책점은 3.45로 LA 다저스, 밀워키 브루어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뒤를 바로 이어 리그 4위에 올랐다. fWAR은 7.5로 리그 전체 5위, FIP는 3.59로 리그 전체 3위에 올라 있다. 2021시즌을 기점으로 오클랜드가 리그에서 손꼽히는 선발진을 갖추게 된 데에는 한 선발투수의 공이 매우 컸다.  

 

스윙맨에서 1선발에 이르기까지

(사진 출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공식 트위터)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오클랜드 내에서 크리스 배싯의 입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토미존 수술 이후 맞이한 첫 풀타임 시즌(19년)에서 기대치를 뛰어넘는 성적(144이닝 3.81)을 올렸지만 배싯은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웠다. 헤수스 루자르도, AJ 퍽이라는 신예 투수들의 로테이션 합류가 확정된 작년에는 더더욱이 그랬다. 그렇게 2020년 시즌이 시작되기 앞서 배싯에게 주어진 역할은 불펜과 선발을 오고 가는 스윙맨이었다.

다시금 눈물 젖은 빵을 먹어야 했던 배싯에게 천금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루자르도와 퍽이 각각 코로나 양성판정, 어깨부상으로 합류가 늦어진 것. 배싯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첫 3경기에서 16.2이닝 1.0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그리고 현지시간으로 8월 4일, 배싯은 한 투수의 피칭을 지켜보며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준비했다. 당시 오클랜드를 상대로 한 랜스 린의 압도적인 피칭(6.1이닝 1실점)을 덕아웃에서 지켜보면서 배싯은 마음 속으로 자신도 저런 투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작년 9월, 디 애슬레틱과의 인터뷰에서 배싯이 남긴 코멘트다.

“린은 절대 똑같은 공을 던지지 않아요. 그는 포심도 던질 줄 알고 투심(싱커)도 던질 줄 알죠. 빠른 공만 주구장창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는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패스트볼을 던지고 있습니다”

“린의 피칭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부터 저는 싱커에 많이 의존했습니다. 이 때문에 상대 타자들은 제가 어떤 공을 던질지 쉽게 예측했을 거예요. ‘포심을 더 섞고 더 많은 커터를 던지자. 그러면 타자들은 내 싱커에 손을 대지 못할 거야’, 이게 린의 피칭을 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 크리스 배싯 –

실제로 8월 4일 이후 배싯은 자신의 주무기인 싱커의 비율을 줄였다(47% → 36.5%). 대신 포심(12.8% → 17.2%)과 커터(19.5% → 23.7%)를 좀 더 적극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행착오(19.2이닝 5.95)를 거친 뒤 배싯은 마지막 4경기에서 훨훨 날았다(26.2이닝 0.34). 그리고 그해 63이닝 2.29라는 호성적을 거두며 사이영 투표 8위에 이름을 올렸다.

 

슬라이더와 함께 또 한 번 날아오르다

더 높은 목적지를 향한 배싯의 날갯짓은 2021년에도 계속됐다. 특히 2021시즌을 맞이해 새롭게 장착한 변화구가 배싯의 날갯짓을 더욱더 화려하게, 그리고 더욱더 힘차게 만들어줬다.

표 1. 배싯의 2020년 성적과 2021년 성적 비교

올 시즌 배싯의 성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리어 처음으로 리그 평균을 넘긴 삼진 비율이다. 2019 시즌에 9이닝당 탈삼진 8.81개를 기록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전체적인 커리어를 봤을 때 배싯은 탈삼진과는 거리가 먼 투수였다. 작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배싯의 삼진 비율은 21.1%로 리그 평균보다 낮았고 9이닝당 탈삼진은 7.86개에 그쳤다. 그렇다면 어떻게 배싯은 한 시즌 만에 탈삼진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걸까? 답은 새롭게 장착한 슬라이더에 있다.

표 2. 배싯의 좌타자, 우타자 상대 9이닝당 탈삼진 비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이래로 배싯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우타자를 상대로한 확실한 결정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간 반대 회전의 포심과 커브를 활용하면서 재미를 보긴 했지만 배싯은 레퍼토리에 기반이 되는 싱커와 어울리는 변화구를 원했다. 지난해 우타자를 상대로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커터의 비율(12.4% → 24.5%)을 늘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큰 성과가 없었고 배싯은 우타자를 상대로 커터를 던질 때마다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점점 고민이 깊어지던 가운데 배싯은 스캇 에머슨 투수코치와 함께 전부터 만지작거렸던 슬라이더를 다시 꺼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올해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슬라이더의 대가로 알려진 서지오 로모와 제이크 디크먼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슬라이더를 장착했다. 그립과 던지는 방법을 싹 다 바꾸며 탄생한 새로운 슬라이더는 현재 싱커와 찰떡궁합을 이루며 ‘더 많은 삼진’이라는 최상의 결과를 배싯에게 가져다줬다(우타자 상대 슬라이더 헛스윙률 40%).

표 3. 배싯의 우타자 상대 투구 비율과 삼진 비율 비교

배싯의 슬라이더가 강력한 데에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타자들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8월 26일(한국시간)을 기준으로 배싯은 평균 76.9마일의 굉장히 느린 슬라이더를 던진다. 실제로 올해 200개 이상의 슬라이더를 던진 투수들 가운데 배싯의 슬라이더는 타일러 로저스(SF), 서지오 로모(OAK) 다음으로 가장 느리다. 앞서 언급한 투수들이 80마일대의 느린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배싯은 93마일의 패스트볼을 뿌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확실히 배싯의 느린 슬라이더는 그간 타자들의 눈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구종은 아니다.

표 4. 올 시즌 슬라이더 구속 순위(느린 순서, 기준: 슬라이더 최소 투구 200개)

두 번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싱커와의 궁합에 있다. 데뷔 때부터 배싯의 싱커는 수평 무브먼트가 상당히 좋은 구종이었다. 올 시즌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같은 릴리스포인트, 같은 익스텐션을 가진 투수들과 비교해 배싯의 싱커는 1.6인치 더 움직였다. 배싯은 이렇게 파고드는 움직임이 좋은 싱커를 우타자의 몸 쪽을 겨냥해서 던진다. 이는 싱커만큼이나 뛰어난 수평 무브먼트(vsAVG +1.4인치)를 자랑하고 우타자의 바깥쪽을 겨냥하는 슬라이더와 완벽히 대척점에 서 있다. 이처럼 올해 장착한 새로운 슬라이더는 그간 배싯의 가려웠던 구석을 정확히 긁어주면서 타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최고의 무기로 자리 잡았다.

배싯의 싱커/슬라이더 오버레이

 

리더로서의 배싯

배싯은 마운드 위에서뿐만 아니라 마운드 밖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작년부터 클럽하우스 내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배싯은 이듬해 투수진의 리더로 성장했다. 개막 6연패 기간 동안 경기당 8.3점을 내주면서 흔들렸던 투수진을 바로잡았던 것도 배싯이었다. 이런 배싯을 몇몇 선수들은 대장(Captain)이라고 부르며 따른다.

또한 배싯은 본인이 가진 노하우를 같은 팀 투수들에게 아낌없이 뿌렸다. 상대 팀 타자의 약점과 접근방식을 공유하고 어떤 식으로 경기를 풀어가야 할지 조언해줬다. 이러한 배싯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게 올 시즌 오클랜드의 최고 히트작인 콜 어빈(144.1이닝 3.68)과 제임스 카프렐리안(88.2이닝 3.25)이다.

시즌 내내 꾸준하게 좋은 스탯을 쌓은 배싯은 부상자가 많아지면서 혼돈에 빠진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 레이스의 ‘돌풍의 핵’으로 급부상했다. 거의 유일하게 200이닝 소화한 가능한 배싯이었기 때문에 평균자책점을 2점대로 낮출 수만 있다면 사이영상 수상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배싯의 질주는 끝을 보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현지 시간으로 8월 17일, 배싯은 마운드 위에서 100마일짜리 타구를 정면으로 맞아 쓰러졌다. 다행히 광대뼈 골절 외에는 다른 부상이 없었고 최근에는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더불어 배싯은 수술을 받기 전 밝은 모습으로 클럽하우스를 방문해 에이스의 이탈로 어수선한 팀 분위기를 바로잡았고, 꼭 다시 돌아올 테니 앞만 보고 달려가자고 이야기하며 팀원들을 독려했다.

스윙맨에서 에이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모두의 존경을 받는 클럽하우스 리더. 이제서야 빛을 보기 시작한 배싯의 레이스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고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마운드에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 The Athletics, Fangraphs, Baseball-Reference, Baseball Savant, MLB.com 

야구공작소 이한규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권승환, 이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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