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키운 공 하나, 열 구종 안 부럽다

(사진=pixabay.com, CCO)

[야구공작소 이재현] ”자, 오다가 정말 직각으로 하나 떨어져주면 좋은데요.”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내 야구 팬들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한마디다. 절체절명의 순간, 마운드의 정대현은 캐스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공’을 던졌다.

싱커가 이끌어낸 ‘이유 있는 땅볼’

직각이라 불린 그 공의 정체는 바로 싱커였다. 그런데 정대현은 왜 하필 그때 싱커를 던졌을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의 구종들 가운데 가장 병살타를 유도하기에 적합한 구종이 바로 싱커였기 때문이다. 싱커는 패스트볼과 비슷하게 날아가다가 끝에서 밑으로 살짝 가라앉는 궤적의 구종이다. 세간에는 이 특징 때문에 땅볼 유도에 효과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자료 1. 2018년 MLB 구종별 타격 결과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떨까? 위 그래프는 2018년 메이저리그의 구종별 인플레이 타구 분포를 보여준다. 이 그래프에 따르면 싱커는 실제로 포심 패스트볼보다 20%P가량 높은 비율로 땅볼을 이끌어냈다. 싱커의 땅볼 유도 능력에 대한 세간의 통념은 빗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땅볼 타구를 자주 유도한 투수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대부분 싱커를 높은 비율로 구사한 투수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표는 최근 10년간 특정 이닝 이상을 소화한 투수들의 단일 시즌 땅볼 비율 순위다(팬그래프 기준, 선발 161이닝/중간계투 48.2이닝 이상).

자료 2. 최근 10년간 MLB 단일 시즌 땅볼 비율 순위(중복 선수 제외)

그런데 만약 도입부의 정대현이 무사 3루 같은 상황에 등판했다면 어땠을까? 이 경우 빗맞은 타구를 유도하는 것보다는 삼진을 잡아내는 것이 필요하므로, 커브가 더 나은 선택지였을 확률이 높다.

자료 3. 2018년 MLB 2 스트라이크 이후 구종별 삼진 비율

여러 가지 구종을 다루는 투수는 이처럼 상황에 맞춰 최선의 구종을 선택할 수 있다. 실제로 야구계 전반에는 다양한 구종을 다루는 것을 어마어마한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가까이는 잭 브리튼, 조금 멀게는 마리아노 리베라 같은 투수들을 떠올려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들은 거의 한 가지 구종만으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기 때문이다.

구종이 다양하다는 것의 의미

투수는 구속과 무브먼트를 다양하게 변화시켜 타자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다. “타격은 타이밍이고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것”이라던 워렌 스판의 명언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대표적으로 ‘패스트볼-체인지업’ 같은 조합은 두 구종의 구속 차이를 이용해 타자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린다. 반대로 거의 동일한 타이밍에서 무브먼트의 근소한 차이를 이용하는 ‘패스트볼-커터’ 같은 조합도 있다. 투수들은 이러한 수단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타자의 타격 시도를 방해한다.

그러나 어떤 구종을 실전에서 능숙하게 사용하려면 오랜 숙달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혹자는 구종 하나를 제대로 익히는 데만 3년 남짓의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마음만 먹는다고 새로운 구종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슬라이더와 커브처럼 던지는 방식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구종들은 동시에 익히기가 특히 어렵다. 손가락이 짧아서 포크볼을 던지지 못하는 투수들처럼 신체 조건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는 투수의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다. 특정 공을 던지기 위한 동작이 몸에 배면서 스스로도 모르는 버릇이 생겨날 수 있다. 여러 구종을 오가며 던지다 보니 투구 밸런스 유지에 애를 먹기도 한다. 실제 프로 투수들 중에도 변화구를 던질 때 팔의 각도나 릴리스포인트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 선수들이 있다. 이는 구종의 다양함이 되려 ‘독’으로 작용해버린 경우다.

데이터는 무슨 말을 할까

구종 가치(Pitch Value)라는 지표가 있다. 투수의 특정 구종이 기대 득점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누적해서 드러낸 지표다. 쉽게 말해, 어떤 구종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실점을 막아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뜻이다. 자연히 실점을 잘 억제하는 투수일수록 구종 가치의 총합이 높아지게 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는 투수가 더 좋은 성적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야구계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투수란 곧 ‘실점을 잘 억제하는 투수’다. 그렇다면 구종 가치를 활용해서 구종 개수와 성적의 상관관계를 파악해볼 수 있지 않을까. 구종 개수에 대한 위의 통념이 사실이라면, 구사하는 구종이 여러 가지일수록 투수의 구종 가치 총합은 커질 것이다.

아래의 표는 메이저리그에서 지난 10년간 투수의 구종 개수에 따라 구종 가치 합계의 평균값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데이터 수집 범위는 ‘자료 2’와 동일).

자료 4. 투수의 구종 개수에 따른 구종 가치 합계

하지만 이 표에는 무려 8가지의 구종을 다루는 투수가 등장하는 등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 계산 방식상의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우선 어떤 구종을 한 번이라도 구사했을 경우 구종 개수에 포함시킨다는 점이 문제였다. 극단적인 예로, 시즌 동안 실험 삼아 한 번 던진 것이 고작인 구종도 여기에서는 염연한 하나의 구종으로 분류됐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선발투수와 중간계투 각각의 특성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평균적으로 구사하는 구종의 개수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선발 투수는 한 번의 등판에서 같은 타자를 여러 차례 상대해야 하는 만큼 대체로 중간계투보다는 더 많은 구종을 구사하게 된다. 제대로 된 분석을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지점에서의 보완이 필요했다.

일단 한 가지 구종을 얼마 이상 던졌을 때 ‘구종 개수’로 계산할 것인지를 정해야 했다. 그 기준은 어느 정도 임의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사람들은 가장 많이 구사한 두 구종의 구사 비율 합계가 90% 이상인 투수를 ‘투 피치’ 유형이라 일컫는다. 뒤집어 생각하면 세 번째 구종의 구사 비율이 10%가 넘는 투수는 투 피치라 부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여기에 착안해 전체 투구 중 10% 이상을 차지한 구종을 구종 개수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보완해야 할 부분이 아직 한 가지 남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투수의 구종 개수는 그 투수의 보직에 영향을 받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래부터는 선발투수와 중간계투를 각각 나누어 분석하기로 했다.

자료 5. 보직별로 본 구종 개수에 따른 구종 가치 합계

팔색조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해, 다룰 수 있는 구종이 많으면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는 추측은 빗나갔다. 선발투수와 중간계투 모두 일정 구종 개수를 넘어가는 순간부터 구종 가치의 합이 하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하락세가 나타나는 시점에는 차이가 있었다. 선발투수의 구종 가치 합계가 구종이 3개일 때까지 상승곡선을 그리다 그 뒤로 차차 감소한 반면, 중간계투의 경우에는 아예 구사하는 구종이 적을수록 구종 가치의 합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원 피치 중간계투들이 선보인 기대 이상의 경쟁력도 주목할 만했다. R.A. 디키 1명만이 조건을 만족한 원 피치 선발투수와 달리, 중간계투의 경우에는 마리아노 리베라, 잭 브리튼, 켄리 젠슨과 같은 걸출한 투수들이 ‘원 피치’에 여럿 이름을 올렸다. 이들이 ‘자료 5’에서 선보인 결과는 중간계투가 훌륭한 구종 한 가지만으로도 우수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선발투수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많은 구종을 다루기보다는 3가지 주력 구종을 구사하는 선수들의 구종 가치 합이 가장 높았다. 만약 이미 3개 이상의 주력 구종을 다루고 있는 투수라면, 새로운 구종을 추가하는 것으로는 성적에 별 개선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자료 6. 다른 지표로 알아본 최적의 구종 개수

구종 가치 합계가 아닌 다른 지표를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도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WAR의 경우 주력 구종이 4가지인 선발투수들이 아주 미미한 차이로(0.02) 가장 좋은 결과를 보여줬을 뿐이다.

정리하자면, 중간계투의 경우에는 구종 하나를 위력적으로 가다듬은 선수가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반대로 선발투수라면 3가지 정도는 주력 구종을 갖추는 편이 좋았다. 이후부터는 구종의 다양성보다는 완성도가 성패를 좌우한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구종을 앞세워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마리아노 리베라
(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다양한 구종을 빠르게 익힐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하늘의 축복이고 노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옛 슬로건처럼, 일단은 지금 갖고 있는 구종을 제대로 완성하는 것이 성공의 첫걸음일 듯하다.

기록 출처: Baseball Savant, Fangraphs

에디터=야구공작소 이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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