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고 있던 야구, 북한 야구

< 2002년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북한-일본 소프트볼 경기를 찾은 북측 응원단 >

오늘날 동아시아는 북중미와 함께 야구 문화가 활성화된 지역이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야구 소식이 끊긴 국가가 있다. 위치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 북한이다.

북한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일반인이 이북 야구 소식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공개된 정보가 워낙 적어 우리는 “야구가 북한에서 ‘미제 부르주아 체육’ 취급받으면서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등의 추측만 할 뿐이다. 이북에서 야구가 성행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북한 야구계를 파악할 수 없는 오늘날의 상황은 무척이나 아쉽다.

 

야구는 한반도 이남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구한말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필립 질레트(Phillip L. Gillette)가 1904년 서울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조직해 한반도에 야구를 정착시켰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런데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기 이전인 1902년, 평양 숭실학교(현 숭실대학교)에서 학생들과 캐치볼을 했다는 내용을 포함한 다양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북 지역도 야구를 즐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04년 이후 YMCA야구단이 자리 잡은 한성을 제외하고 야구 경기가 처음 열린 곳도 이북 지역이었다. 1909년에 진행된 ‘제1차 도쿄유학생모국방문경기’에서 YMCA야구단과 경기를 마친 유학생야구단은 국내 최초로 개성, 평양, 선천, 철산 등 한반도 서북 지방을 순회하며 시범경기를 개최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YMCA야구단이 같은 해에 개성으로 원정을 떠났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후 이북 야구계는 일본 유학생야구단이 다시 개성과 평양, 그리고 진남포를 찾은 1920년부터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야구 활동이 중지된 1943년까지 규모를 키워나갔다. 1921년 제2회 전조선야구대회에 개성학당과 오성학교, 그리고 숭실대학이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이북 지역 야구팀들이 전조선야구대회를 포함한 전국대회에 꾸준히 참가했다. 1930년대부터는 평양과 함흥 등지에서 자체적으로 대회를 치를 수 있을 정도로 환경이 갖춰졌다.

그렇게 성장하던 이북 지역 야구는 1942년 치러진 ‘제15회 전조선실업연맹전’에 겸이포(송림)팀이 출전한 것을 끝으로 조선 야구사에서 행적을 감춘다. 1945년 광복을 맞으며 국내에서 야구 경기가 다시 열렸지만,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며 이북 야구의 소식도 끊긴 탓이다.

 

멈춰버린 이북 야구계의 시계

다만 다양한 자료를 살펴보면 이북 지역에서 야구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1946년 10월,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광복절 1주년 기념으로 열린 ‘북조선종합체육대회’에 야구가 경기 종목으로 확인된다. 또한 1965년에 북한이 전국 학교의 체육 활동 증진을 위해 발효한 ‘내각 결정 제7호’는 보급하는 운동 종목에 야구를 포함했다. 다만 북한의 야구협회는 1946년에 조직된 대한야구협회보다 훨씬 늦은 1985년에 와서야 창설되고, 아시아 야구연맹에는 1990년에야 가입하는 등 야구를 위한 환경이 조성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

1980년대부터는 가끔 중국에 자국팀을 파견해 야구 대회에 참가한 기록이 남아있지만, 북한 야구대표팀이 참가한 국제대회는 1991년 일본 니가타에서 5개국 친선대회로 열린 제1회 환동해국제친선야구대회와 1993년 호주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가 전부다.

이후 북한은 국제 대회에 출전하지 않지만, 체육단과 실업팀에서 야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상대적으로 숙련이 쉬워 보급에 유리한 소프트볼이 야구에 비해 활성화된 편이다. 1990년대 이후로 국제 대회에 출전하지 않은 야구대표팀에 비해 북한 여자소프트볼대표팀은 2000년대까지 국제 무대에 나섰다.

< 북한에서 보도한 야구 경기 >

 

사라져가는 북한의 야구장

우리가 북한의 야구 소식을 들을 기회가 손에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북한에는 제도화된 경기를 위한 정식 규격의 야구장이 부족해서일까?

공개된 정보가 제한적이라 북한 내 야구장들의 세부 사항을 알아내기는 어렵다. 다만 구글 어스를 통해 북한에 위치한 야구장을 식별할 수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구장들을 찾아봤다. 필자가 파악한 북한의 경기장은 총 4곳이다.

< 남포야구장. 2015년 10월(좌) / 2021년 7월(우)=구글 어스 >

남포야구장은 평안남도 진남포시에 위치한 구장으로, 앞선 북한 뉴스에서 보도된 야구 경기가 열린 곳이다. 베이스라인이 그어져 있는 등 야구장으로 기능했으리라 추측되지만, 2021년 7월 기준으로 야구장의 형태를 잃고 다른 종목 규격의 경기장이 확인된다.

< 평양 어머니 섬. 2015년 8월(좌) / 2016년 8월(우) >

평양 보통강구역에 위치한 어머니 섬에는 2015년 8월까지 야구장이 있었다. 해당 장소도 야구장 라인이 보이지만, 2016년 8월 기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 메아리 사격장 인근. 2009년 12월(좌) / 2011년 3월(우) >

평양에 위치한 메아리 사격장 인근에는 신축 공사를 진행하다 사라진 야구장도 있다. 2010년대 전후로 북한이 신축 야구장을 건설하다 해체했다는 기사를 고려하면 해당 공간이 공사를 진행했던 부지로 추측된다.

< 평양 김정숙 탁아소 인근. 2009년 3월(좌) / 2023년 4월(우) >

북한 내 야구장이 대부분 해체된 시점에서 현재까지 확인되는 경기장은 평양에 위치한 김정숙 탁아소 인근 구장이다. 북한이 2010년에 보도한 여자소프트볼 경기가 열린 곳으로 추정되는 이 구장은 2023년 4월에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위성 사진 정보를 종합하면 2023년 4월 기준 단 1곳을 제외한 다른 야구장들은 해체됐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국제대회에 나서지 않으면서 위축될 조짐을 보였던 이북 야구계가 이제 몇 없는 야구장마저 잃었으니 더는 야구와 관련된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다.

 

이북 야구에 대한 우리의 자세

그렇다면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이북 야구계를 도울 방법은 없을까? 용품 지원 또는 지도자 파견 등으로 인프라 구축을 돕는 사례는 스포츠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북 야구계를 도우려 해도 정치적인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어려움을 당장 극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선 우리가 야구 장비를 이북에 보내고 싶어도 ‘UN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 2270호’에 따라 스포츠용품은 사치품으로 분류돼 북한에 반입할 수 없다. 지난 평창올림픽 때도 중고 용품을 북한에 기증하려 했으나 결국 무산된 전례가 있다. 지도자를 파견하는 방식도 통일부의 심사는 물론 북측의 허가가 필요한 만큼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다만 북한과 마찬가지로 공산권 국가인 라오스와 베트남에서 이만수 이사장을 중심으로 야구를 정착시킨 선례가 있는 만큼,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이북 야구계를 돕는 게 영원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념 차이를 뛰어넘고 이북에도 야구의 꽃씨가 닿을 그날을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참고 = 韓國野球史(한국야구사), 조선야구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야구연표, 한국 야구의 탄생, 자유아시아방송, “북한 체육정책의 변화 과정(1945~1970).” 국내박사학위논문 북한대학원대학교, 2011. 서울. 홍성보, “스포츠를 통해서 본 남북한 선수선발 및 양성과정 비교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북한대학원대학교, 2017. 경상남도. 이민정, 조선일보

야구공작소 김민준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민경훈, 유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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