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보통의 우리는 겸상하는 어르신이 수저를 들고 나서 식사를 시작했다고, 또는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돌려 술을 마셨다고 친구에게 자신이 예절 바른 사람인지 내세우지 않는다. 교통 신호를 잘 지켰다면서 자신의 준법정신을 자랑하는 성인도 내 주위에는 없다. 정상인이라면 출근 전 샤워를 했노라고 동료에게 은근히 뽐내지도 않는다. 내가 당연한 것을 자신의 컨셉으로 ‘유독’ 앞세우는 자들을 경계하는 이유다.

나에게 “합리”적 소비란 무조건 최저가를 찾아서 가성비 최고의 상품을 찾기보다는, 내 효용을 최대치로 올려주는 결정을 맘 편히 내리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를 가치 중립적인 가성비, 객관적 최선의 의미로 사용하지만 실상은 아닌 경우가 많다. 합리와 객관을 앞세우는 주장이 공감을 얻으려면 어떤 선택이 누구에게, 무엇을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가 명확히 정의되어 있어야 한다. 나에게 합리가 우리에게는 비합리가 될 수 있고, 편향된 “우리”의 합리도 얼마든지 반사회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합리적 가치 평가”, “통계적 분석”과 같은 표현들이 시대적인 분위기를 타고 묘한 힘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들을 명분으로 앞세운 주장에 반대하는 측은 반동이며 수구이고 비이성과 무식으로 연결되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맞서게 된 묘한 분위기가 생겼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싫다. 업자로서 해도 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경계할 바가 많다.

합리적 가치 평가나 통계적 분석임을 앞세우는 논리에 반박하려면 데이터의 수집, 선택, 그리고 결과의 유의성 수준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을 검증해야 한다. 과정마다 어떤 가정을 통해 논리를 쌓았는지, 그 가정은 합리적인지를 조목조목 따져봐야 한다. 이것이 과학이고 이성이다. 결과가 자신의 신념과 배치되어도 수긍할 수 있는 용기와 열린 마음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많은 시간, 에너지, 그리고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먹고사니즘이 아니라면 굳이 뭔가를 합리적으로 결정했다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궁서체로 맞서지 않는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지점을 교묘하고 집요하게 이용한다. 그들의 행태는 대략 이렇다.

합리적 평가나 통계적 분석이 근거임을 “유독” 앞세우는 자 중 평가 방법론과 원천 데이터를 자세히 공개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에 따르면) 그의 말은 언제나 일관되게 논리와 통계적으로 뒷받침된 이성적인 주장이다. 알고리즘과 같은 일관된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사람이 하는 일에 가치 중립적인 결정이 어디 있을까만, 자신의 결정 근거에 자신의 취향도 들어가 있다고 말하는 이가 좀처럼 없다.

그런 사람들은 말투와 행동을 통해 “나 통계 돌린 거니까, 내 말은 이성적이야. 합리적 가치 평가를 통해 도출된 결과에 반대해? 이성이 있긴 한 거임? 수구임? 혹시 무식함? “ 과 같은 프레임으로 상대방을 공격한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잘 쓰지 않는 현란한 단어도 자주 쓴다. 논리가 복잡하고 말도 길다. 왜? 그들은 진실에 관심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알아 달라고 대중을 설득하려면, 긴말이 꼭 필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심과 진실은 언제나 단순하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숫자를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들은, 자료의 취사 선택에도 능숙하다. 가정에 가정을 더한 자신의 뇌피셜을 훌륭한 전략으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정치적 지향을 두고 벌어지는 언론사가 자행하는 악마의 편집이 데이터 분야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합리”와 “객관”, “통계”만을 유독 앞세우는 자들에게 속절없이 당하지 않으려면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잘못을 인정할 때, 당시의 판단이 맞지 않았던 정황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그리고 결과가 잘못되었을 경우 자신이 인용한 통계가 잘못된 것이니 자신도 “피해자”라고 핑계 댈 밑밥을 미리부터 까는지도 살펴야 한다. 꼬리 자르기는 단지 그들만의 특기는 아니지만, 그들이 지닌 최애 기술 중 하나다.

경기력이 세계 최고도 아닌 KBO를 보면서, 지고 또 져도 내 고향 팀을 목이 터지라 응원하고, 졌어도 고생했노라 박수를 보내고, 응원 팀과 선수의 굿즈를 사는 팬심이 그저 비이성으로 취급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프랜차이즈와의 이별에 눈물 흘리는 팬들의 순수와 낭만을 비이성과 무지로 여기며, 그것에 조소하는 이들의 합리는 누구의, 무엇을 위한 합리였을까?

팬들이 그간의 낭만을 거두고 “깐깐하고 합리적인 소비자”로 변하는 것을 누군가는 두려워했으면 좋겠다.

(야구공작소 객원 칼럼니스트 최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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