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2004년 – 팬이 만들어 준 박정태의 복귀전

  •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2004년은 그야말로 ‘2루수의 저주’라고 할 수 있는 시즌이었다. 롯데는 유망주 이대호를 3루수로 쓰기 위해 전년도 3할 타율을 기록한 주전 3루수 조성환을 2루수로 돌렸다. 그러나 조성환은 개막 3주 후인 4월 24일 LG 트윈스전에서 공에 맞아 오른 손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투입된 4년 차 내야수 신명철은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공백을 메우는 듯했다. 그러나 신명철 역시 5월 27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조성환과 마찬가지로 투구에 손가락이 골절되며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이제 남은 선수는 박현승, 박남섭(개명 후 박준서), 박진환, 문규현 정도였다. 먼저 기회를 받은 것은 신인 박진환이었다. 그러나 박진환은 6월 3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팀이 한 점 차로 앞서던 9회 말 수비에서 양준혁의 뜬공을 놓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어 박남섭 역시 6월 9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송창식의 투구에 헬멧을 맞으며 경기에서 빠지는 아픔을 겪었다. 박남섭은 다행히 금방 돌아오기는 했지만 내야수 자원이 부족했던 롯데는 시즌 초반 외야수로 돌아섰던 김주찬이 2루 수비를 잠시 보는 해프닝도 있었다. 개막 2개월 만에 2루수 자리에서 여러 일이 생기자 당시 구단의 한 직원은 “고사라도 지내야겠다”라며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롯데의 2루수들이 연쇄 이탈하는 가운데에도 있어야 할 것만 같은 한 선수의 이름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1991년부터 10년 넘게 거인군단의 2루수 자리를 지켜왔던 그 이름, 바로 ‘악바리’ 박정태였다. 후배들이 다치고, 부러지고, 쓰러지는 동안에도 박정태는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2군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박정태는 2004시즌 2군에서 28경기에 나와 타율 0.324, OPS 0.851을 기록하며 여전히 자신이 그라운드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태는 2000년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속된 말로 구단에 ‘찍혀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롯데 구단은 2002년에는 LG와 트레이드를 시도했고, 2003년에는 달성 불가능한 옵션이 붙은 FA 계약서를 내밀더니 돌연 재계약 포기를 선언하기도 했다. 쏟아지는 팬들의 항의에 계약은 맺었지만 박정태는 2003시즌 부상이 겹치면서 결국 1995년 이후 가장 적은 50경기 출전에 그쳤다. 여기에 2004년 부임한 신임 양상문 감독은 시범경기 이후 박정태를 올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박정태에게 콜업 기회가 없던 건 아니었다. 당시 롯데는 6월 들어 7연패를 당한 후 무승부가 이어지면서 13경기에서 1승만을 기록하는 굴욕적인 성적을 거뒀다. 이렇게 되자 팬들은 ‘롯데팬은 악바리 박정태를 원합니다!’라는 현수막을 사직구장에 걸었다. 어느 때보다도 박정태가 필요한 시점에서 좀처럼 1군에 올리지 않고 있는 구단에 대한 항의성 메시지였다. 결국 롯데는 분위기 쇄신을 위해 6월 16일 박정태의 콜업을 결정했다.

그런데 하필 1군 복귀 일주일 전 박정태는 수비 도중 주자의 팔꿈치에 맞아 늑골을 다쳤다. 숨을 쉴 때도 통증이 느껴지자 박정태는 결국 1군 콜업을 포기했다. 구단은 혹여나 있을 팬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 ‘갈매기 마당’에 복귀가 무산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후 몸을 추스른 박정태는 결국 8월 3일 한화전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1군에 복귀했다. 전반기 내내 박정태의 복귀를 원하던 팬들의 바람이 드디어 통한 것이었다. 또한 전반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정수근의 음주 사고 등이 터진 팀의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결단이기도 했다. 박정태를 기용하지 않았던 양상문 감독도 “당분간 박정태는 한 방이 필요할 때면 반드시 내보낼 계획이다”라는 말로 박정태에 대한 신뢰감을 드러냈다.

이날 경기는 7월 노장진의 합류 이후 선발로 복귀한 손민한과 2003년까지 롯데에서 뛰었던 문동환의 선발 맞대결이 펼쳐졌다. 두 선수는 6회까지 상대 타선에게 한 점도 내주지 않고 꽁꽁 틀어막으며 투수전을 이어갔다. 그리고 7회 말, 선두타자 이대호가 좌익수 뜬공으로 물러난 후 6번 박연수가 안타를 치고 나갔다. 이후 대주자로 나선 김주찬이 2루 도루에 성공하며 주자는 2루로 갔고, 타석에는 드디어 박정태가 대타로 들어섰다.

2004년, 박정태가 활약할 때마다 팬들은 기뻐했다. (사진=롯데 자이언츠)

특유의 흔들 타법으로 기선제압에 나선 박정태는 침착하게 볼을 골라냈다. 날카롭게 떨어지는 변화구를 온몸으로 참아내며 출루를 위해 용을 쓴 박정태는 결국 볼넷을 얻어내며 1루로 출루했다. 찬스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한 노장의 투지에 후배들도 응답했다. 롯데는 박기혁의 중전 안타로 1사 만루 찬스를 만든 후 박현승의 적시타로 선취점을 얻었다. 이어 대타 조효상의 밀어내기 볼넷이 나오며 박정태도 득점에 성공했다. 단지 밀어내기 득점이었을 뿐이었지만 후배들은 더그아웃 앞에 도열해 오랜만에 돌아온 선배를 환영했다. (최상단 사진)

롯데는 7회 얻어낸 3점을 투수들이 끝까지 지키면서 결국 3대 0으로 승리했다. 선발 복귀 후 20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한 손민한과 뒷문을 튼튼하게 걸어 잠갔던 노장진의 활약도 돋보였지만, 이날 팬들에게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던 선수는 단연 박정태였다.

박정태는 다음날 경기에서도 6회 대타로 나와 이날 팀의 유일한 득점이 된 적시타를 기록하며 활약을 이어갔고, 결국 후반기 26경기에 나와 27타석에서 안타 5개, 볼넷 9개를 얻어내며 대타로서 알토란 같은 활약을 이어갔다. 타석에 나오기만 하면 절반 넘게(출루율 0.519) 출루하며 후배들에게 밥상을 차려줬다. 과거 삼성 팬들이 1990년대 중반 이만수가 나오기만 하면 환호를 했듯이, 롯데 팬 역시 박정태가 타석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도 응원을 보냈다.

그리고 2004년 10월 5일, 잠실 원정을 떠난 박정태는 상대 팀 LG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유지현(현재 등록명 류지현)의 은퇴식을 반대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지현이 자신의 꽃다발을 들고 3루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이윽고 유지현은 박정태에게 꽃다발을 주며 포옹했다. 서로 마지막을 향하는 입장에서 먼저 은퇴하는 후배가 선배에게 전하는 예우였다.

이날 6회 초 대타로 나와 우전 안타를 기록한 후 대주자로 교체되는 장면은 박정태의 현역 마지막 모습이었다. 6일 후인 10월 11일 박정태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라는 말과 함께 14년 동안 정들었던 프로 무대를 떠났다.

2004년 8월 3일 한화-롯데전 박스스코어(사진=박스스코어 프로젝트)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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