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 멈춰! 진화한 아기 독수리 정은원

사진=한화 이글스 제공

전통적인 1번 타자의 최고 덕목 중 하나는 정확성이었다. 정확성 즉 공을 맞혀서 살아나가는 능력은 타율로 대표된다. 야구에서 리드오프는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의 몫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며 야구에 대한 통념도 변했다. 세이버메트리션의 노력으로 기존의 통념과 달리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더 중요하다는, 득점 생산력에 기반한 의견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최근 야구에선 1번 타자를 평가할 때 타율보다 출루율을 더 많이 활용한다.

지난 2020시즌 LG 홍창기와 키움 박준태는 바뀐 시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타율이 각각 0.279와 0.245에 그쳤던 홍창기와 박준태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봤을 땐 썩 훌륭한 타자가 아니다. 그러나 두 선수의 진가를 보여준 건 타율이 아닌 출루율이었다. 홍창기는 4할이 넘는 출루율로 6위를 기록했고 박준태는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지만 443타석에서 0.389의 출루율을 기록했다. 홍창기는 1번에서 LG의 공격을 이끌었고 박준태는 9번에서 키움 타선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

KBO 리그에서 출루의 가치가 재조명됐던 지난해 홍창기나 박준태만큼은 아니지만 눈 야구에 눈을 뜬 듯한 선수가 또 한 명 있었다. 2년 전 한화 팬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아기 독수리 중에 대장 독수리’ 정은원이다.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프로 입단 첫해인 2018년 1군에 데뷔한 정은원은 이듬해 한화의 붙박이 1번 타자로 자리 잡았다. 그의 2019년 기록은 고졸 2년 차 선수의 첫 풀타임 성적으로는 우수한 편이었다. 그러나 ‘리드오프’에게 기대하는 출루 능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2019년 정은원이 기록한 0.317의 출루율은 1번 타순에서 220타석 이상을 소화한 11명의 타자 중 가장 낮았다. 비교 대상을 규정 타석을 채운 선수로 넓혀도 평가가 좋아지진 않았다. 출루율 순위표에서 정은원의 이름은 밑에서 다섯 번째에 적혀 있었다.저조한 출루율의 원인은 세부 지표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선 볼넷이 너무 적었다. 정은원의 볼넷 비율은 규정 타석을 채운 55명 중 41위였다. 반면 삼진 비율은 21위로 각각 0.515, 0.519의 장타율을 기록한 러프, 최정보다 높았다. 0.48의 삼진 대비 볼넷 비율(BB/K, 이하 볼삼비)은 김재환, 오재일보다 낮고 팀 내 홈런 1위였던 이성열과 비슷했다. 그렇다고 컨택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정은원의 2019년 컨택률은 당시 3할 타율을 기록했던 채은성과 비슷했다. 컨택이 준수함에도 볼넷이 적고 삼진이 많았다는 건 공을 맞히는 능력과는 별개로 나쁜 공을 골라내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뜻이다.그런데 지난해 천지개벽할 일이 벌어졌다. 볼넷 비율은 약 6%나 끌어올리고 삼진 비율은 약 3% 낮추면서 1년 만에 볼삼비를 1.00으로 올렸다. 볼넷 비율만 놓고 보면 1번 타자로 나섰던 이용규(BB% 12.0)보다 높았다. 덕분에 타율이 약 2푼 낮아졌음에도 출루율은 약 5푼 정도 올랐다. 타율에서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지만 출루율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는 이변(?)을 연출한 정은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맞힐 수 없는 너, 이젠 놓아줄게

볼넷이 늘어나고 삼진이 줄었다는 건 선구안이 좋아졌다는 뜻이다. 선구안이 뛰어난 타자는 마구잡이로 배트를 휘두르지 않는다. 칠 수 있는 공 즉 존 안으로 향하는 공 외에는 쉽게 스윙하지 않는다. 이처럼 ‘스트라이크에만 휘두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정은원은 이 어려운 걸 해냈다.

지난해 정은원의 아웃 존 컨택과 스윙을 살펴보자. 우선 볼에 대한 컨택 능력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빠른 공의 경우 높은 쪽과 몸쪽의 컨택률은 높아졌지만 낮은 쪽과 바깥쪽의 컨택률은 낮아졌다. 변화구 역시 낮은 쪽과 몸쪽의 컨택률이 높아졌지만 높은 쪽과 바깥쪽의 컨택률은 감소했다. 전체 아웃 존 컨택률 역시 전년보다 크게 좋아지진 않았다. 아웃 존으로 향하는 빠른 공과 변화구에 대한 공략법을 찾았다고 보긴 힘들었다.

그러나 컨택률과 달리 스윙률의 변화는 뚜렷했다. 대부분의 아웃 존 코스에 대한 스윙률이 전년보다 낮아졌다. 빠른 공의 경우 낮은 코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개 구간의 스윙률이 감소했다. 변화구의 경우엔 존 바깥 모든 구간에 대한 스윙 빈도가 줄어들었다. 어차피 공략할 수 없는 공이라면 스윙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마음속에 참을 인(忍)자 세 개를 그린 정은원은 아웃 존 스윙률을 전년보다 6%나 끌어내렸다. 그가 기록한 18%의 아웃 존 스윙률은 ‘선구안의 대명사’ 홍창기를 포함해 1번 타순에 220번 이상 들어섰던 12명의 타자 중 가장 낮은 수치였다. 존을 벗어나는 공의 유혹을 참아내는 인내심만큼은 각 팀의 붙박이 1번 타자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적은 타석 수(303타석)를 고려해야겠지만 적어도 이전 두 시즌보다 선구안이 개선된 건 분명했다.

아웃 존 스윙률은 낮아졌지만 2S 이후 커트 비율은 전년보다 크게 높아졌다. 볼에 좀처럼 스윙을 하지 않는 데다 카운트가 몰린 후에도 끈질기게 버티다 보니 삼진 비율이 줄어드는 건 당연했다. 그 결과 타석에서 승부를 길게 가져가며 출루 기회를 이어갈 수 있었다. 자연스레 타석당 투구 수도 많아졌다. 지난해 정은원의 타석당 투구 수는 300타석 이상 소화한 타자 중 5위였다. 원래도 많은 편이었던 타석당 투구 수가 더 늘어나며 투수 입장에선 더욱 골치 아픈 존재가 됐다.

 

아기 독수리에서 대장 독수리로

정은원은 볼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략하기보다 배트를 내지 않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물론 볼에 대한 스윙을 줄이는 것만이 출루율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아웃 존으로 향하는 공에도 배트를 내며 안타를 만들거나 커트를 이어가며 출루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용규다. 이용규는 아웃 존 스윙률이 25%로 낮지 않지만 아웃 존 컨택률도 90%에 육박한다. 결국 중요한 건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정은원은 맞힐 수 없다면 혹은 맞혀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면 휘두르지 않으면 된다는 해답을 찾았다.

19일 현재 정은원의 타율은 0.179에 불과하지만 출루율은 0.396에 달한다(4월 19일 기준 IsoD 0.217로 리그 1위). 낮은 타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만도 하지만 정은원은 개의치 않는다. 그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외국인 감독님과 코치님을 만난 후 타자의 자존심이 타율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출루율을 중시하게 됐다”며 “생각을 바꾸는 데 있어 고민은 없었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타격을 정립하고 있는 프로 4년 차 정은원. 그가 과연 어떤 발톱을 가진 대장 독수리로 거듭날지 지켜보도록 하자.

 

야구공작소 김진우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곽찬현, 송인호

기록 출처 = 스탯티즈(STATIZ), 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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