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같은 볼넷 없다

당신은 여자친구의 립스틱 색깔을 구별할 수 있는가? 필자를 포함한 많은 남성에게 쉽지 않은 과제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같은 결과처럼 보여도 그 속에 숨겨진 과정과 가치는 매번 다르다.

야구의 타격 결과 중 볼넷은 참 매력적이다. 말 그대로 기다림의 미학이다. 긴 승부 끝에 어렵사리 1루로 걸어 나갈 때 안타와 다른 미묘한 쾌감을 받는다. 타자의 집중력과 투지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스트레이트 볼넷은 어떤가? 공이 어느 곳으로 빠질지 궁금해진다.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극단적으로 비교하자면 3볼 상황과 2스트라이크 상황을 들 수 있다. 직관적으로 볼넷을 얻어내기 가장 쉬운/어려운 카운트다. 실제로 두 상황에서 도출된 결과는 어느 정도의 비율 차이가 날까? 또한 각 상황에서 얻어낸 볼넷의 가치는 얼마나 다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2014년부터 올해 8월 이전까지의 데이터를 활용해 봤다.

※ 고의4구가 제외된 결과이며 문자 중계 데이터를 활용했기에 공식 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볼넷의 비율

<이닝별 볼넷 비율>

가장 먼저 알아볼 부분은 볼넷 비율이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KBO리그 타자는 타석당 8.4%의 비율로 볼넷을 얻어냈다. 정규 이닝 중에는 1회에 가장 비율이 높았고 9회에는 가장 적은 볼넷 비율을 나타냈다. 연장에 들어서면 볼넷 비율이 평균보다 높아졌다.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1회에는 타자들의 집중력이 높고 투수들이 강한 타순을 상대해야 한다. 9회에는 주로 경기를 마무리 짓기 위한 강한 불펜 투수가 등판한다. 연장전에 들어서면 상대적으로 마무리보다 약한 투수가 들어서기 마련이다.

<볼카운트별 볼넷 비율>

볼카운트별 볼넷 비율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 대체로 볼카운트가 같을 때 스트라이크가 많아질수록 볼넷 비율은 줄어들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스트라이크 카운트에선 볼이 많아질수록 볼넷 비율이 늘어났다.

일반적으로 볼넷 비율에 더 큰 영향을 준 건 볼카운트였다. 0볼과 3볼 상황을 비교했을 때 볼넷 비율은 대략 10배가량 차이가 났다. 2스트라이크(3.1%) 상황과 3볼(61.0%) 상황은 예상했던 대로 매우 큰 차이를 보였다.

<주자 상황별, 점수 차별 볼넷 비율>

주자가 없거나 1루에 주자가 들어찼을 때 볼넷 비율은 크게 줄었다. 반면 주자가 1루에 없으면 평소보다 높은 볼넷 비율을 보였다. 수비팀 입장에서 볼넷을 주더라도 병살 유도가 쉬워진다는 이점이 생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점수 차를 따졌을 때 4점 차 이상 지고 있으면 볼넷 비율이 가장 낮았다. 하지만 경기 상황 때문에 볼넷을 적게 주는 것이라 일반화할 순 없다. 선발투수의 부진 등으로 일찌감치 승부의 추가 기운 상황에선 점수 차보다 투수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 승부의 추가 기울어진 상황에선 타자가 적극적인 타격을 한다는 추측도 할 수 있다.


볼넷의 득점 가치

<이닝별 볼넷 득점 가치>

볼넷을 얻어낼 경우 어느 정도의 득점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우선 경기 초반부에 볼넷을 얻어내면 좀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다. 9회, 10회에는 비교적 더 낮은 득점 가치를 보였다. 이는 앞서 설명했던 9회에 볼넷 비율이 줄어드는 이유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10회 이후로는 표본이 적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볼카운트별 볼넷 득점 가치>

볼카운트별 득점 가치는 스트라이크가 많을수록, 볼이 적을수록 높은 수치를 보였다. 카운트별 볼넷 비율과는 반대다. 스트라이크가 많은 카운트에서는 삼진에 대한 위험부담이 높다. 따라서 그 상황 자체가 기대 득점이 매우 적을 가능성이 높다.

볼이 많은 카운트에서는 타자에게 유리한 카운트다. 자연스레 안타를 비롯한 다른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볼넷을 얻기보다 출루를 하면서도 주자들을 진루시킬 수 있는 결과를 기대하는 게 이로울 수도 있다.

<주자 상황별, 점수 차별 볼넷 득점 가치>

주자 상황을 따져보면 주자가 없을 때 가장 높은 득점 가치를 보였다. 하지만 볼넷이 나옴으로써 득점 가치가 하락하는 상황도 있다. 수비하기에 좀 더 편한 상황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은 경우다. 특히 주자 만루인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상황에 비해 -0.457점의 득점 가치를 보였다. 이미 1득점이 보장된 상황임에도 말이다. 이는 득점이 난 뒤에도 유지되는 ‘주자 만루’라는 상황의 특수성 때문으로 보인다.

점수 차별로도 볼넷 득점 가치는 달랐다. 대체로 2점 차 이내로 지거나 이기고 있을 때 가장 득점 가치가 낮았다. 일반적으로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질수록 득점 가치가 높아졌다.


볼넷의 승리 가치

<이닝별 볼넷 승리 가치(백분율 대신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표기)>

마지막으로 볼넷이 언제 가장 승리 확률을 높이는지 확인해보자. 표에 있는 결과는 각 상황의 일반적인 결과보다 볼넷을 얻었을 때 승리 확률이 얼마나 변했는지 보여준다.

먼저 이닝별로 살펴보면 경기 중반부에 얻어낸 볼넷이 승리 확률을 가장 높여줬다. 특히 1, 2, 9회보다는 타순이 한 바퀴 돌 무렵인 3회부터 높은 승리 가치를 보였다.

<볼카운트별 볼넷 승리 가치>

볼카운트별 결과는 볼넷 득점 가치와 비슷하게 나타났다. 스트라이크가 많고 볼이 적은 상황에서 얻어낸 볼넷이 가장 가치가 높았다. 타자가 카운트 싸움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질수록 볼넷을 얻어냈을 때 높은 승리 가치를 거뒀다.

<주자 상황별, 점수 차별 볼넷 승리 가치>

주자 상황별 가치는 주자가 득점권에 좀 더 많이 포진돼 있을수록 낮았다. 볼넷으로 인해 주자가 더 진루하지 못해 잔루로 남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점수 차별로는 2점 차 이상으로 이길 때보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승리 가치가 훨씬 높았다.


그래서, 하나는 하나가 아니다

지금까지 볼넷이라는 하나의 타격 결과를 놓고 많은 상황 속에서 차이를 알아보았다. 3볼에서는 대부분 어렵지 않게 볼넷을 얻어냈고 2스트라이크에서는 그 비율이 많이 감소했다. 어렵게 얻어낸 볼넷일수록 특정 시점에서부터 가장 높은 득점/승리 가치를 기록했다. 수비에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볼넷은 비교적 가치가 낮았다. 상대와 적은 점수 차에서 볼넷은 유용한 공격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결과는 일반적인 통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굳이 이렇게 데이터를 분석해 볼넷의 가치를 알아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데이터가 모두 들어맞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야구는 사람이 하고 공은 둥글기 때문이다. 카운트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그 볼넷의 가치가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을 봄으로써 야구에, 볼넷에 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2스트라이크 이후에 얻어낸 볼넷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고, 자신이 응원하던 타자가 안타 대신 비어 있던 1루를 채웠을 때 조금은 아쉬울 수도 있겠다. 볼넷이 단순히 볼 4개로 보이지 않게 됐다면 글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자, 이제는 립스틱 색깔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기록 출처: NAVER 문자 중계

야구공작소 홍길동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김동민, 조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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