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넋 숨져간 그 자리, 노송은 말을 잊었네 – 6.25와 야구

6.25 전쟁 당시 미군 / 사진=국가기록원

2020년 6월 25일, 세상은 어제와 같이 여전히 고요하다. 전국적인 장마로 인해 어두컴컴하기는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갈 정도로 오지는 않고 있다. 며칠 동안 떠들썩했던 북한의 날 선 대남 대응도 그들만의 ‘최고 존엄’이 제동을 걸며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정확히 70년 전 6월 25일은 한반도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비극이 일어난 날이었다. 얼마 전까지 하나의 국가를 이뤘던 같은 민족까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했던 현대사의 비극. 바로 6.25 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약 3년 1개월간 벌어졌던 6.25 전쟁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국토는 폐허가 됐고 200만 명에 달하는 남북한 주민들이 사망했다. 국토 분단은 고착화됐고 세계는 얼어붙었다.

제주도와 남부 일부 지방을 제외하면 모든 곳이 전쟁터였던 상황에서 스포츠가 예외일 리 없다. 황금사자기, 청룡기 등 당시 진행됐던 아마추어 야구대회는 전쟁의 여파로 2~3년간 개최되지 않았다. 한국인 최초로 해외리그에서 뛰었던 박현명(전 한신 타이거스)과 그의 동생인 박현식 전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은 전쟁의 여파로 이산가족이 되었다.

이렇듯 전쟁으로 모든 것이 멈춘 상황에서 국내외의 야구선수들 역시 참전용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심지어 UN군 신분으로 참전한 사람 중에는 메이저리그(MLB) 선수들도 있었다. 이 선수들은 자신의 업(業)인 야구를 뒤로하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소총을 잡고 비행기 조종간을 잡아야 했다.

6.25 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참혹한 전쟁의 가운데 있었던 야구선수들의 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하자.

수원 땅에 불시착한 4할 타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있는 테드 윌리엄스 소개. 1952년부터 1953년까지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설명이 있다. / 사진=wikimedia Bernard Gagnon

‘MLB 최후의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6.25 전쟁에 참전한 것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1941년 타율 0.406을 기록하며 생애 첫 타격왕에 오른 윌리엄스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며 1942년 미 해군에 입대했다. 그 해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던 윌리엄스는 1943년부터 비행교육대 교관을 맡았다. 2차대전 막바지에는 진주만에서 예비 조종사로 대기했다.

2차대전 때는 실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윌리엄스이지만 6.25 전쟁 때는 달랐다. 1952년 5월 1일(이하 한국시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3타수 2안타 1홈런을 기록한 윌리엄스는 이틀 뒤 항공기 조종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한반도로 향했다. 윌리엄스는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며 39차례 전투에 나섰다.

수원비행장에 불시착한 윌리엄스의 비행기 / 사진=미국 PBS 유튜브 캡처

한 번은 목숨이 위태로웠던 상황을 겪기도 했다. 윌리엄스는 비행 도중 북한군에게 일격을 맞고 추락 위기에 몰렸다. 비상 탈출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큰 부상을 입고 야구를 못할 것을 우려한 윌리엄스는 이를 거부했다. 가까스로 수원비행장에 비상 착륙한 윌리엄스는 심한 화상을 입고 한 달 동안 병원에 있어야만 했다.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비행기에서 내린 직후 윌리엄스는 어떤 사람의 사인 요구를 받았다. 윌리엄스는 “믿어지니? 어떤 개XX가 사인해달라고 하더군”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고 한다.

휴전협정 체결 11일 후인 1953년 8월 7일 펜웨이파크에 복귀한 윌리엄스는 37경기에서 타율 0.407 13홈런을 기록하며 14개월의 공백을 무색하게 했다. 윌리엄스는 두 차례 전쟁에 참전한 후로도 메이저리그에서 8시즌을 더 뛰었고, 1966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윌리엄스만 참전했나? 나도 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홈구장 펫코 파크에 있는 제리 콜먼 기념관. 해병대 시절 사진도 있다. / 사진=wikimedia commons Bagumba

윌리엄스 외에도 6.25 전쟁에 참전한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있다. 뉴욕 양키스 소속 올스타 내야수이자 은퇴 후 인기 해설자로 활약한 제리 콜먼 역시 6.25 전쟁 참전용사다. 윌리엄스처럼 미 해병대 조종사였던 콜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이미 57차례나 비행 임무를 수행한 베테랑이었다

콜먼도 ‘한군두’(군대 두 번 입대하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52년 6.25 전쟁에 참전한 콜먼은 휴전 전까지 63차례 임무를 수행했고 13개의 에어 메달(미군 훈장 중 하나)을 받았다. 콜먼 역시 추락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경험을 겪기도 했다. 전우를 비행 도중 떠나보내야 했고, 메이저리그 복귀 후 이 사실을 유족들에게 알려야 했던 순간도 있었다. 콜먼은 1953년 메이저리그 복귀 후 이전 같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콜먼의 양키스 팀 동료이자 전 아메리칸리그 회장인 바비 브라운 역시 전쟁통에 한국 땅을 밟았다. 툴레인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브라운은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브라운은 한국에 오던 날을 떠올리며 “인천에 내렸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월드시리즈 1차전이 있는 날이었지. 돈 뉴컴은 다저스의 선발투수로 나섰고, 나는 한국에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전선에 있지는 않았지만 미국 본토에서 군 복무를 수행한 선수도 있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윌리 메이스, 어니 뱅크스, 화이티 포드 등은 전쟁 발발 후 군에 징집돼 입대했다. 비록 위 선수들처럼 전장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이 선수들 역시 군 복무로 인해 커리어에 손해를 보았다는 점은 같다.

북한 땅에 잠든 메이저리거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있는 밥 네이버스에 대한 설명.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나와있다. / 사진=베이스볼 레퍼런스 홈페이지 캡처

앞서 언급한 윌리엄스나 콜먼, 브라운은 위험한 순간을 겪기도 했지만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와 제2의 인생을 출발했다. 그러나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한반도 산하에 잠들어야 했던 선수도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밥 네이버스(1917~1952)였다.

사실 메이저리그 출신이기는 하지만, 네이버스가 리그에 남긴 족적은 거의 없다. 1936년 프로 생활을 시작한 네이버스는 1939년 딱 한 시즌 동안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현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7경기에 출전한 선수다. 당시 네이버스는 11타수 2안타 1홈런으로 평범한 성적을 거뒀다. 이후 네이버스는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네이버스는 1941년 2월 결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6개월 후 부인을 교통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네이버스의 동생 모리스는 “형은 몇 년 동안 ‘야구선수라는 직업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는 생각에 괴로워했다”며 이후 모든 의욕을 잃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네이버스의 프로 기록은 1941년이 마지막이었다.

네이버스는 1942년 미 육군 항공대에 입대하며 직업 야구선수라는 신분과 작별했다. 군 생활에 만족감을 느낀 네이버스는 2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군에 남았다. 재혼에 성공한 네이버스는 1950년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난 그해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해 네이버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 공군 소령으로 참전하게 된 네이버스는 여러 차례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1952년 8월 9일, 북한 지역에서 야간 전투 비행 도중 대공포 공격을 당했다. 같은 편대원 둘과 함께 추락한 네이버스를 목격한 사람은 이후 아무도 없었다. 미군 포로가 석방된 후로도 네이버스의 생사가 알려지지 않았고 결국 1953년 말 전사 처리됐다. 네이버스는 역대 메이저리그 선수 중 유일하게 북한 땅에서 사망한 사람이 됐다.

한국군으로 참전한 야구선수는 누가 있을까

2005년 KBO 올스타전 당시 시구자로 나선 박현식 전 감독(오른쪽) / 사진=SK 와이번스

앞서 메이저리그 선수들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인 만큼 한국 야구선수들도 당연히 6.25 전쟁에 참전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선수로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아시아의 철인’ 박현식(1929~2005)이 있다.

7세 때 북한에서 인천으로 내려온 박현식은, 형 박현덕이 감독으로 있던 동산중(현 동산고)을 다니며 명 투수이자 명 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박현식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9월 피난지 대구의 훈련소에 입소하여 전쟁에 참전했다.

카투사로 복무한 박현식은 군대에서 자신의 야구 실력을 키웠다. 체격이 좋은 미군과 야구를 하면서 약점을 보완해 나갔다. 김영조(1923~1981) 전 국가대표팀 감독은 “(박현식은) 고교 때는 장타자였으나 정확성이 없었는데, 6.25 후 카투사에 입대하면서 주한미군 리그에 출전, 야구의 진수를 터득했다”고 평가했다. 휴전 이후 중위로 전역한 박현식은 1968년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나서는 UN군 / 사진=국가기록원

박현식은 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선수로 활약하면서 야구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이제는 존재조차 희미해지는 선수들도 있다. 바로 학도병으로 참전한 소년병 선수들이다.

대구상업중(현 대구상원고)은 1950년 6월 18일 열린 제5회 청룡기 중학야구대회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 일어난 전쟁 속에 이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대구상업중 야구부에서는 청룡기 결승전에 등판했던 박상호와, 석나홍, 이문조 등이 어린 나이에도 학도병으로 참전해 북한군과 싸웠다.

그리고 세 선수는 그라운드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전황이 바뀌었던 치열한 낙동강 전투에서 세 소년은 모두 전사했다. 이들의 요절 이후 대구상업중은 1950년대 전국대회에서 한 번도 4강 안에 들지 못했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세 학도병 야구선수들을 기리기 위해 대구광역시 교육청과 삼성 라이온즈는 전쟁 70주년인 2020년 6월 25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추모 행사를 열기로 했다.

6.25 70주년, 이제 이들을 기억하자

6.25 전쟁에 참전했던 선수들은 자신의 야구 커리어에 피해를 보았다. 적게는 한두 시즌을 허송세월로 보내며 누적 기록에 손해를 입은 경우가 생겼고, 아예 현역으로 복귀하지 못하기도 했다. 밥 네이버스 소령이나 대구상업중의 학도병 선수들처럼 전선에서 눈을 감은 선수들도 있었다.

2차대전과 6.25 전쟁에 모두 참전한 콜먼은 훗날 “전쟁에서 돌아온 후 몸 상태가 완전치 않았다. 하지만 후회는 절대 없다”며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브라운 역시 “아무도 전쟁에 대해 물어보지 않지만, 그들(한국)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조국을 위해, 혹은 머나먼 타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참전 야구선수들을 기억하는 건 어떨까.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에디터=야구공작소 나상인

기록 : 베이스볼 레퍼런스, SABR, 국가기록원, 국립영천호국원
참고기사 :
‘Korean War shortened their baseball careers, but no regrets’, USA TODAY, 2013년 7월 1일
‘Jerry Coleman, baseball player and announcer, dies at 89’, 워싱턴포스트, 2014년 1월 6일
‘[인천인물 100人 · 64]’아시아의 야구철인’ 박현식’, 경인일보, 2007년 1월 24일
‘대구 라팍서 6·25 참전 야구부 학도병 추모 행사’, 연합뉴스, 2020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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