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종 가치는 펀 쿨 섹시하지 못해

요즘 인터넷에서 인기를 끄는 소재 중에 일본의 정치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아들, 고이즈미 신지로가 내놓은 엉뚱한 발언이 있다(신지로 역시 대를 이어 공직에 임하고 있다). 후쿠시마 현에 대한 정책을 약속한 그에게 한 기자가 공약의 실현 근거를 물었다. 그러자 걸작 같은 답변을 남겼다. “하겠습니다. 그것이 약속이니까.”

신지로는 인터넷에서 본명보다 ‘펀쿨섹’이라는 신기한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미국 뉴욕에서 그는 기후변화 대책에 대해 이런 명언(?)을 남겼다. “기후변화 같은 스케일이 큰 문제를 다루려면 즐거워야 하고(Fun), 멋져야 하고(Cool), 섹시해야 한다(Sexy).” 펀, 쿨, 섹시라는 뜻 모를 그의 발언에 그게 무슨 뜻이냐고 기자가 묻자, 그는 “그걸 설명하는 것 자체가 섹시하지 않다”는 뚱딴지 같은 답을 내놓았다.

신지로는 시종일관 A가 B인 이유는 A이기 때문이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똑같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그게 마치 앞의 말의 근거인 것 마냥 갖다 붙이는 것이다. 이를 순환 논법, 순환 논리의 오류라고 한다. 이런 예시를 들어봐도 좋겠다. “류현진은 평균자책점이 낮다. 실점을 적게 했기 때문이다.” “이정후는 타율이 높다. 안타를 많이 쳤기 때문이다.” 펀 쿨 섹시하지 않은 순환 논리다.

순환 논리의 오류는 야구 통계를 곁들인 주장에서도 발견된다. 최근 들어 간간이 보이는 사례는 구종 가치에 관한 것이다. 어떤 투수 A가 좋은 성적을 내는 이유는 A의 구종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라는 식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구종 가치의 정체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도대체 구종 가치가 뭔데

구종 가치란 무엇인가? 먼저 기대 득점(Run Expectancy)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야구의 모든 상황은 볼카운트, 주자 상황, 아웃카운트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특정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해당 이닝이 끝날 때까지 평균적으로 몇 점을 얻을 수 있는지를 계산한 것이 그 상황의 ‘기대 득점’이다. 투수가 공을 던지면 볼카운트가 변하거나 타격 결과에 따라 아웃카운트/베이스 상황/점수 등이 바뀐다. 그리고 이에 따라 볼카운트 단위, 타석 단위로 기대 득점도 변한다.

구종 가치는 구종 별로 매 투구에 따라 기대 득점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누적한 값이다. 예를 들어 1스트라이크 0볼에서 스트라이크를 던져 0-2가 되면 공격 측(타자)에 불리해지기 때문에 공격 팀의 기대 득점은 줄어든다. 이때 기대 득점이 줄어든 만큼 타자에게는 감점이 되고 투수에게는 가점이 된다. 반대로 1스트라이크 0볼에서 볼을 던져 1-1이 되면 공격 팀의 기대 득점은 늘어나고, 늘어난 만큼 타자는 점수를 얻고 투수는 잃는다. 안타를 치거나 아웃이 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매 투구마다 기대 득점의 변화량을 구종별로 누적한 값이 해당 구종의 구종 가치가 된다.

따라서 투수가 던진 특정 구종의 ‘가치’는 해당 구종을 이용해 유리한 볼카운트를 점할수록, 아웃을 잡아낼수록, 출루를 억제하고 실점을 덜 할수록 늘어나게 된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모든 공을 스트라이크로 던져서 27아웃 퍼펙트 게임으로 마무리하는 경우일 것이다. 모든 구종에 플러스 점수가 매겨질 것이니 말이다.

헌데 이런 원리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구종 가치는 투수가 호투를 펼칠수록 늘어나고, 반대로 경기를 망치면 줄어들게 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호투=높은 구종 가치 누적’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종 가치가 높은 투수일 수록 겉보기에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약속이니까 지켜야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구종 가치와 가장 비슷한 투수 스탯은 ERA, 평균자책점이다. 둘의 공통점은 과정보다는 표면적인 최종 결과를 건조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안타와 볼넷을 허용하더라도 자책점만 줄이면 평균자책점은 낮아진다. 구종 가치의 근간이 되는 기대 득점의 변화량도 마찬가지다. 수없이 3볼 0스트라이크에 몰리고 많은 안타를 맞더라도 점수를 주지 않고 마지막에 아웃을 잡기만 하면 플러스 점수가 나온다.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이 ‘꾸역투’를 지켜보며 느낀 고구마 삼키는 듯한 답답함은 드러나지 않는다.


구종 가치는 구종 랭킹이 아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그럼 지난해 KBO리그 ‘직구’ 구종 가치 최상위권 선수 이름을 맞혀보자. 감이 오지 않는다면 그냥 지난해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투수들을 떠올려보자. 아마 못해도 반타작 가까이는 성공할 것이다. STATIZ 기준으로 지난해 직구 구종 가치 1~5위는 양현종, 린드블럼, 채드벨, 산체스, 구창모였다. 각각 ERA 1위, 2위, 14위, 5위, 11위에 오른 리그 에이스급 투수들이다. 과장 좀 보태서 구종 가치로 선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행위는 “저 선수가 잘한 이유는 좋은 투수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이렇게 구종 가치는 평균자책점과 비슷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단점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미래의 성적을 예상하는 데는 구종 가치가 FIP 등의 지표보다 도움이 덜 된다는 것도 ERA를 빼다 박은 부분이다. 아니, 사실상 ‘구종별 ERA’와 다를 바 없다. ERA는 단기간의 실적을 잘 나타내지만 미래의 성적을 예상하는 능력은 FIP나 xFIP에 뒤처진다. 구종 가치도 마찬가지다. MLB 투수의 구종 가치 데이터를 제공하는 <팬그래프>는 구종 가치의 연간 상관계수가 0.25 이하에 그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올해 기록으로 내년 기록을 점치는 건 사실상 무의미하다.

거기다 잘하는 투수가 많이 던진 공은 결과도 좋은 경우가 부지기수다 보니, 단순히 구종의 질이 좋고 나쁨을 논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삼는 김광현이 지난해 슬라이더 구종 가치 2위에 오른 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란 말인가. 누군가 유희관의 투심 패스트볼 구종 가치가 27점으로 리그 전체 1위에 해당하니 2.2점을 기록한 김광현의 포심 패스트볼보다 10배 뛰어나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말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구종 가치에 대해 좀 더 펀, 쿨, 섹시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저 선수가 잘하는 건 A 구종의 가치가 높기 때문’이라는 뻔한 동어 반복은 이제 그만 접어두기로 하자.

야구공작소 박기태 칼럼니스트
에디터=야구공작소 곽찬현, 나상인, 오연우
일러스트=야구공작소 송인호
기록 출처=STAT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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